우리나라 대기업은 대부분 오너 일가가 직접 경영에 개입하는 '재벌 경영'을 하고 있다. 이는 최고경영자(CEO)가 하기 어려운 중대한 기업의 의사결정을 신속히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다만 그 결과에 대한 책임도 져야 한다. 단기적으로는 굴곡이 있지만, 중장기적으로 성장세를 이어가는 대기업들이 오너 경영의 긍정적 사례다. 하지만 오너가 기업 성장의 발목을 잡거나 퇴행시키는 경우도 있다. 이른바 '오너 리스크'가 있는 기업을 차례로 살펴본다. <편집자 주>
[더팩트ㅣ장병문 기자] "제약회사의 신뢰도가 떨어진 가장 큰 이유는 리베이트 때문이다. 제가 제약협회장이 된 후 꼭 해야겠다는 것이 있는데 그건 신뢰 회복이다."
고 어준선 안국약품 회장이 지난 2009년 한국제약협회(현 한국제약바이오협회) 회장을 맡으면서 한 언론사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어준선 회장은 '우수의약품을 개발·보급함으로써 건강의 등불을 밝힌다는 신념으로 안국약품을 경영했고, 한국제약협회 회장이 되고 투명 경영, 글로벌 경영, 리베이트 근절 등을 강조했다.
어준선 회장은 지난 2022년 8월 숙환으로 별세하면서 그의 장남 어진 안국약품 부회장이 경영을 이어받았다. 어진 부회장과 안국약품은 리베이트 혐의로 수년째 재판을 받고 있다. 부친이 생전에 강조했던 기업의 신뢰는 2세 경영에 들어오면서 땅바닥에 떨어졌고, 회사의 성장은 뒷걸음질 치기도 했다. 어진 부회장은 올해 사법리스크 해소와 신뢰 회복, 그리고 성장 등 해결해야 할 과제가 쌓여있다.
어진 부회장은 지난 2022년 3월 돌연 대표이사와 사내이사직을 내려놓았다. 안국약품은 건강상의 이유라고 설명했지만 그의 사법리스크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일각에서는 오너가 징역형을 받을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 선제적으로 전문경영인을 내세운 것으로 봤다.
지난 2022년 8월 혈압강하제와 항혈전 응고제 후보물질을 식품의약품안전처의 임상시험 승인 없이 직원 28명에 투약한 혐의로 어진 부회장은 징역 10개월을 선고받았다. 또 의사들에게 90억 원대 불법 리베이트를 제공한 혐의로 2019년부터 재판을 받는 중이다. 지난해 1월 열린 불법 리베이트 공판에서 전 안국약품 직원이 증인으로 혐의를 인정했지만 어진 부회장 측은 공소 사실을 전면 부인하고 있다.
어진 부회장이 경영에서 물러난 뒤 회사는 전문경영인 체제가 됐지만 그는 1년이 채 되지 않은 지난해 1월 임시주주총회에서 사내이사로 복귀했다. 어진 부회장은 사법리스크가 해결되지 않은 시점에 사내이사로 복귀한 것을 두고는 상속세 회피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받았다. 중소·중견기업을 2세가 상속받을 때 최대 600억 원까지 상속세가 공제된다. 어진 부회장은 사내이사 복귀 직전 부친이 보유한 안국약품 주식 267만7812주를 상속받았다. 어진 부회장의 지분율은 22.68%에서 43.22%로 상승했다.
안국약품 이사회는 어진 부회장을 사내이사로 선임한 배경으로 "회사의 비전 수립과 신사업 업무를 총괄하고 대외적 업무를 안정적으로 수행하기 위함"이라고 밝혔다. 회사는 어진 부회장의 활동분야를 '신사업'으로 명시했다.
안국약품은 지난해 헬스케어와 비임상 CRO(임상시험수탁기관) 등을 신사업으로 결정했다. 헬스케어 사업은 기존 사업 기술력과 설비 등을 활용해 성장시킨다는 계획이다. 비임상 CRO 사업은 의약품과 의료기기, 화학물질, 화장품 등의 영역에서 비임상 및 임상시험에 용역을 제공하는 분야다. 안국약품은 이 시장에서 신뢰를 잃었다. 어진 부회장은 직원들에게 불법 임상시험을 한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아서다. 그는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다. 당시 어진 부회장과 함께 기소된 안국약품 중앙연구소 실장 A 씨는 징역 10월을, 임상시험수탁기관 관계자 B 씨는 벌금 1000만 원을 선고받았다.
어진 부회장이 사내이사로 복귀한 지 1년이 됐지만 주목할 만한 신사업 소식은 들리지 않고 있다. 어진 부회장은 지난해 2월과 3월을 제외하고 매달 법원에 출석했다. 올해도 4월까지 재판 일정이 줄줄이 잡혀 있다. 어진 부회장은 회사의 미래 먹거리 발굴 업무를 총괄하는 중책을 맡고 있지만 본인 재판 일정을 소화하기도 벅찬 모습이다.
어진 부회장의 불법 리베이트 혐의에 대한 재판은 2019년 시작해 4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 회사는 재판 기간 동안 처분을 받지 않고 영업을 지속할 수 있어 나쁜 상황은 아니다. 다만 어진 부회장이 정상적인 경영 활동에는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다.
상속세 문제도 걸려있다. 가업상속공제 제도를 통해 상속세를 공제받기 위해서는 상속세 신고기한부터 2년 이내에 대표이사 등으로 취임해야 한다. 이런 이유로 어진 부회장의 대표이사 복귀가 조심스럽게 점쳐지고 있지만 사법리스크가 해소되지 않고 있는 점은 부담이 된다.
취재진은 어진 부회장의 대표이사 복귀와 신사업 성과 등을 묻기 위해 안국약품에 문의를 했지만 답을 듣지 못했다.
한 재계 관계자는 "경영 환경이 급변하는 시대에 오너십의 중요성은 커지고 있다"면서 "사법리스크를 안고 있는 오너는 운신의 폭이 좁아질 수밖에 없어 경영 활동에 많은 제약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 전문경영인 체제서 수익성 개선
실제로 안국약품은 어진 부회장의 재판이 시작되면서 실적은 악화됐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안국약품은 어진 부회장이 대표이사로 있던 2019년 영업이익은 24억 원이었지만, 2020년 6121만 원의 적자를 냈다. 2021년에는 영업손실 11억 원으로 적자 폭이 커졌다. 매출은 2019년 1558억 원, 2020년 1433억 원, 2021년 1635억 원을 기록했다.
어진 부회장이 경영에서 물러나고 원덕권 대표이사 체제로 바뀐 2022년 실적은 반등했다. 안국약품의 2022년 매출은 2053억 원으로 사상 최대 실적을 냈고 영업이익은 96억 원으로 개선됐다. 지난해 3분기까지 매출은 1694억 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14% 성장했다.
원덕권 대표는 취임 첫해 적자 탈출이라는 성과를 낸 후 외형 성장을 목표로 중장기 사업목표 달성에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안국약품은 순환기(레보텐션)와 호흡기(시네츄라), 소화기(레토프라) 등 3개 품목 매출이 전체 75%에 달한다. 원덕권 대표는 사업다각화를 위해 제품 위탁생산을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또 건강기능식품 판매 활성화를 위해 온라인 유통채널 '에이원더'를 구축해 운영하고 있다. 안국약품은 국내 최초 눈 영양제 '토비콤'의 인지도를 활용해 토탈헬스케어 사업에서도 성과를 낸다는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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