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최지혜 기자] "지난달까지는 있었던 전세 매물들이 1월이 되자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연초부터 전세 매물을 찾으려고 하루에 2만 보씩 걸으면서 이태원역 인근 부동산을 샅샅이 뒤졌지만 결국 월세 가계약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올해부터 집주인들이 전세 보증금을 낮춰야 하는 여건이라 월세를 낀 매물밖에 없다고 하는데, 당장 2월부터 새집이 필요한 상황이라 울며 겨자 먹기로 80만 원짜리 원룸 빌라를 계약할 판입니다." (백모 씨·28세 남)
빌라(연립·다세대) 전세 매물이 자취를 감추고 있다. 정부가 전세사기 대책의 일환으로 전세보증 가입 기준을 강화하면서 집주인이 받을 수 있는 전세 보증금이 쪼그라들자 전세로 내놓았던 매물을 반전세 혹은 반월세로 전환하고 있어서다.
정부는 지난해 5월 전세사기 예방을 위해 주택도시보증공사(HUG) 전세보증금반환보증 가입 문턱을 높였다. 전세보증금반환보증은 임대인이 보증금을 상환하지 않을 때 보증기관이 대신 갚아주는 제도다. 전세가격이 내리고 전세사기가 기승을 부리면서 보증 가입은 임대차 계약에 있어 필수 요소가 됐다.
정부의 전세보증 가입요건 강화에 따라 올해부터는 보증 가입 시 공시가격 인정 비율은 140%, 전세가율은 90%로 각각 종전 대비 10%포인트 낮아졌다. 강화된 기준을 적용하면 공시가격이 1억 원인 빌라의 전세보증 가입한도는 1억5000만 원에서 1억2600만 원 수준으로 내리게 된다. 이 경우 집주인은 갱신·신규계약 시 보증금 2400만 원을 세입자에게 돌려줘야 한다.
그러나 정작 시장에서는 보증금은 내린 대신 월세 가격이 오르는 형태로 계약 방식이 바뀌는 상황이다. 서초구 서초동의 한 공인중개사무소 대표는 "보증금을 돌려주기 위해 대출을 받아야 하는 집주인들이 많은데, 이런 경우 월세로 이자를 내려 한다"며 "전세는 사실상 매물이 아예 없다고 보면 되고, 반지하라도 최소 20만 원 이상의 월세가 붙은 매물뿐"이라고 말했다.
또 전세사기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지면서 전세반환보증에 가입되지 않을 경우 세입자를 찾을 수 없는 상황이다. 마포구 연남동의 한 공인중개사무소 관계자는 "집주인은 사실상 보증 가입한도까지만 전세금을 받을 수 있다"며 "정부는 보증 가입요건을 강화하면 전셋값이 내릴 것으로 예상했겠지만, 현실은 집주인이 보증금을 내리고 월세를 올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청년을 위한 저금리 전세자금 대출을 받아 주거비를 감당하려 했던 세입자들은 순식간에 높아진 월세에 당황하고 있다. 취업준비생 백모 씨는 "지난달까지 한남동에 나왔던 전세 매물을 계약하려 했는데 1월이 되자마자 전세 매물들이 월세로 바뀌어 올라왔다는 연락을 받았다"며 "전세 계약으로 약 50만 원을 예상했던 주거비가 30만 원 넘게 오를 판"이라고 말했다.
아파트와 달리 빌라는 공시가가 시세와 차이가 많이 난다. 특히 한남동, 연남동, 서초동 등 주거 수요가 높은 곳은 매매가격과 공시가격이 수억 원 차이가 나기도 한다. 실제로 백모 씨가 계약하려던 주택은 공시가격 3040만 원이다. 이 매물의 전세 호가는 지난달까지 1억6000만 원에 전세보증 가입이 가능했다. 그러나 강화된 보증가입 요건을 적용하면 이 주택은 보증금을 3840만 원만 받아야 한다.
보증금을 1억 원 이상 낮춰야 했던 집주인은 월세로 바꿔서 부동산에 내놨다. 백씨가 실제로 가계약한 주택도 공시가격이 6910만 원에 불과하다. 이 주택에 대한 전세보증 가입 한도는 약 8706만 원 수준이다. 집주인은 이 주택을 보증금 2000만 원, 월세 80만 원에 내놨다.
고시원에서 빌라 원룸으로 이사를 계획했던 이모(30·남) 씨 역시 "올해 이사를 계획하고 연남동 일대의 월세 시세를 60만 원 선에 맞춰 주거비를 계산했는데, 눈여겨봤던 주택의 월세가 20만 원가량 올라버렸다"며 "입지를 고려하더라도 너무한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한남동 공인중개사무소 관계자는 "한남동의 경우 용산공원 호재와 재개발 기대감으로 인한 매매 투자 수요, 인근 출퇴근 직장인들과 재개발 전 거처를 찾는 임차수요 등이 몰려 빌라의 매매가격과 전월세 가격이 높다"며 "한남동을 비롯한 용산구 전체에 보증 가입 요건에 맞게 보증금을 받았던 집은 절반도 채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극히 일부 임대인들은 전세보증 가입을 안 하더라도 높은 전세가격을 유지하려는 이들도 있겠으나 대다수는 월세로 전환하려 한다"며 "통상 보증금 1억 원에 월세 50만 원으로 계산되고 있다"고 부연했다.
실제로 부동산 중개업체 집토스가 서울과 경기, 인천 지역의 국토교통부 연립·다세대 전월세 실거래가와 주택 공시가격을 비교 분석한 결과 2022년 체결된 전세 계약의 66%가 동일한 금액으로 올해 계약을 갱신할 경우 전세금 반환보증에 가입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역별로 서울 63%, 경기도 66%, 인천 86%의 만기 예정 빌라 전세계약이 기존 전세금으로 전세보증에 가입할 수 없을 것으로 조사됐다.
다만 보증 가입을 위한 시세 조정은 지역별 편차가 나타난다. 편차가 큰 지역의 경우 월세 가격이 큰 폭으로 오를 가능성이 높다. 전세보증금을 낮추면서 이를 월세로 돌려받으려는 집주인들이 나올 수밖에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반면 빌라라도 공시가격과 전세값 차이가 크지 않던 지역의 경우 월세 상승 가능성은 비교적 낮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공시가격이 1억1000만 원 수준인 마포구 망원동의 한 빌라는 1억 원대에 전세가격이 형성돼 있다. 이 주택의 집주인은 오는 4월 전세 1억5000만 원에 전세 매물을 내놓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해당 주택의 보증가입한도는 1억4500만 원으로 전세 호가와의 격차가 500만 원가량밖에 나지 않는다.
송승현 도시와경제 대표는 "세입자 입장에선 월세를 더 내더라도 보증 가입이 가능한 매물을 찾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전세보증금 미반환 위험에 노출되지 않기 위한 세입자들의 방어 심리로 월세는 점차 높아지는 가운데 전셋값은 내릴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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