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 | 이한림 기자] 금융 당국이 국내 증권사들의 채권 자전거래 행위를 무더기로 적발하고 '불법 관행'이라고 공개적으로 꼬집으면서 증권가에 뒤숭숭한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다. 최근 라임·옵티먼스 펀드 사태에 대한 책임으로 최고경영인(CEO) 징계까지 이어진 증권가의 경영진의 내부통제 미흡 지적이 또 수면 위로 떠오를 전망이다.
18일 증권업계에 따르면 전일 금융감독원(금감원)은 올해 5월 9개 증권사(미래에셋·하나·NH투자·한국투자·키움·KB·유진투자·교보·SK증권)의 채권형 랩(자산종합관리계좌)·신탁 업무 실태에 대한 집중 점검을 실시한 결과, 이들 모든 증권사의 운용역들이 만기도래 계좌의 목표수익률 달성을 위한 불법 자전거래로 고객 계좌 간 손익을 이전했다고 밝혔다.
랩·신탁은 증권사가 투자자와 일대일 계약을 통해 자산을 운용하는 금융 상품으로, 통상 3개월에서 6개월가량 단기 여유자금을 굴리기 위해 기업이나 기관이 주로 가입하는 상품이다. 또 랩·신탁은 실적배당 금융 상품이기 때문에 원금이 보장되지 않는 게 특징이다. 다만 증권사들이 수익률 경쟁을 벌이면서 장기채권이나 유동성이 떨어지는 기업어음(CP) 등을 편입해 이를 원금보장형처럼 판매하는 불법 관행을 저질러왔다는 게 금감원의 지적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위법 사실을 적발하고 증권사 운용역 30여 명의 혐의 사실을 수사 당국에 제공하기로 했다"며 "운용상 위법행위로 손실이 발생한 랩·신탁 계좌에 대해서는 금융투자업계와 증권업계가 협의해 객관적인 가격 산정 및 적법한 손해 배상 절차 등을 통해 환매가 이뤄질 수 있게 하겠다"고 말했다.
반면 증권가는 금융 당국의 이번 제재 움직임에 대해 말을 아끼고 있다. 조사를 받은 9개 증권사가 모두 불법 자전거래 혐의로 적발되면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으나, 최근 박정림 KB증권 사장과 정영채 NH투자증권 사장 등 증권사 현역 CEO들이 라임·옵티머스 펀드 사태로 사상 초유의 CEO 중징계를 받는 등 금융 당국의 칼날이 국내 증권사의 전반적 내부 관리 소홀로 향해 있는 점도 다소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동시에 다소 억울하다는 입장도 일각에서 나온다. 일시적 변동성에 따른 투자자의 큰 피해가 우려되거나 펀드 환매 등이 목적일 때 채권형 상품도 자전거래를 일부 허용하고 있어서다. 금감원이 지적한 불법 관행을 수익률 경쟁을 위해 고의적으로 펼쳤다기보다는 투자자의 손실을 줄이기 위한 불가피한 결정이었다는 해석이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지난해 채권시장 경색되면서 사용 가능한 신용이 부족하고 금리가 크게 오르는 등 일시적이 변동성이 높아지면서 투자자들이 큰 손실을 입을 가능성도 높아졌다. 이러한 위험에서 투자자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부득이하게 자전거래 등에 나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금감원은 강경한 기조를 유지할 전망이다. 함용일 금감원 부원장이 지난 7월 서울 여의도 금융투자협회에서 열린 증권업계 CEO 간담회에서 랩·신탁 관련 위법 행위에 대해 경영진의 책임을 강조했고, 이번에도 대표이사 등 주요 경영진의 승인에 따라 고객 계좌의 기업어음(CP)를 고가 매수하는 방식으로 사후 이익을 제공한 사례가 확인됐다고 밝혀서다.
당시 함용일 금감원 부원장은 "고객자산 관리 운용 관련 위법행위를 실무자 일탈이나 불가피한 관행 탓으로 돌릴 수 없다"며 "컴플라이언스, 리스크 관리, 감사부서 등 어느 곳도 랩·신탁 관련 위법 행위를 거르지 못했다면 이는 전사적 내부 통제가 작동하지 않았다는 점을 드러낸 심각한 문제로 내부 통제의 최종 책임자인 최고 경영진과 무관하다고 볼 수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