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 | 이한림 기자] 국내 증권사들이 연말 인사를 통해 임기 만료를 앞둔 최고경영자(CEO)를 대거 교체하거나 교체할 움직임을 보이면서 배경에 관심이 쏠린다. 전반적으로 실적이 악화하거나 리스크 관리에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는 곳도 있어 새로운 리더십을 바탕으로 한 강력한 내부통제 강화가 신임 CEO들의 최우선 과제로 꼽힌다.
25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13인의 CEO가 올해 말과 내년 3월 사이 임기 만료를 앞두고 있다. 각각 14년, 5년간 CEO를 바꾸지 않았던 메리츠증권과 한국투자증권은 모처럼 신임 대표이사를 선임했으며 일찌감치 연말 인사를 발표한 미래에셋증권도 새 인물을 수장으로 앉혔다.
이 외에도 KB·신한투자·NH투자·삼성·대신·교보·하이투자·DB금융투자·SK증권 사장들이 내년 3월 전까지 임기 만료를 앞두고 있다. 키움증권 수장은 임기가 남았으나 사임 의사를 전달하면서 이사회의 재결정을 기다리고 있다.
먼저 변화를 택한 곳은 미래에셋증권이다. 미래에셋증권은 미래에셋그룹 창립 멤버이자 7년간 증권 부문 CEO를 맡았던 최현만 회장이 용퇴하면서 계열사 미래에셋자산운용처럼 2인 각자 대표이사 체제를 선택해 분위기 쇄신에 나섰다. CEO 한자리는 25년째 미래에셋그룹에서만 일하며 해외사업에서 두각을 낸 김미섭 미래에셋증권 부회장이 선임됐으며, 내달 7일 임시 주주총회(주총)를 통해 허선호 부회장과 전경남 사장 중 1명이 추가 대표이사 자리에 오를 예정이다. 미래에셋증권 측은 "각자 대표이사 체제로 책임경영을 강화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장원재 메리츠증권 신임 대표이사 사장과 김성환 한국투자증권 신임 대표이사 부사장에도 시선이 쏠린다. 이번 인사를 통해 신임 CEO에 오른 두 사람은 '장수 CEO'가 이끌던 회사의 새 얼굴로 바통을 이어받은 공통점이 있다.
메리츠증권의 경우, 모기업 메리츠금융지주가 주력 계열사이던 화재와 증권을 100% 지분 자회사로 흡수하면서 지주 중심의 경영 체제로 개편한 후 처음으로 단행한 CEO 인사로 의미를 더한다. 지난해 국내 증권사 중 유일하게 '1조 클럽'(연간 영업이익 1조 원 이상)에 올랐다가 올해 실적이 뒷걸음질 치고 있는 메리츠증권은 장원재 대표가 2014년 삼성증권, 2020년 메리츠화재 등에서 CRO(최고리스크책임자)를 역임한 경력이 있는 만큼, 리스크 관리에 집중할 전망이다. 14년간 메리츠증권을 이끌며 증권가 최장수 CEO로 이름을 날리던 최희문 메리츠증권 부회장은 지주로 자리를 옮겨 그룹 운용부문장을 맡게 됐다.
국내 프로젝트파이낸싱(PF) 부동산 1세대로 불리는 김성환 한국투자증권 신임 대표 역시 리스크 관리에 초점을 둔 경영을 펼칠 것으로 관측된다. 김 대표는 한국투자증권에서 20년 넘게 일하며 프로젝트금융(PF) 본부장, IB그룹장, 경영기획총괄 부사장, 개인고객그룹장 등 다양한 부문에서 리더를 맡아 회사의 성장과 함께 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5년간 한국투자증권 수장을 맡은 정일문 한국투자증권 사장은 대표이사 명함을 내려놓고 부회장으로 승진한다. 한국투자금융그룹 관계자는 "이번 인사는 내외적으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 직면하고 있는 불확실성보다는 변화의 장기적 흐름과 방향성에 주목해 한 걸음 더 성장하는 데 역점을 뒀다"고 말했다.
◆ 연임이냐 교체냐…임기 만료 앞둔 CEO 거취도 주목
인사가 단행되지 않았지만, 임기 만료를 앞둔 증권사 CEO들도 연임과 교체 갈림길에서 주목도를 높이고 있다. 이중 내년 1월 임기가 끝나는 박정림 KB증권 대표이사 사장은 최근 금융위원회로부터 라임 등 펀드 사태에 관련해 '직무 정지' 처분을 사전 통보받으면서 사실상 연임 가능성이 낮다는 관측이 나온다.
내년 3월 임기 만료를 앞둔 'NH투자증권 역대 최장수(6년) CEO' 정영채 NH투자증권 대표이사도 같은 사태로 금융당국의 제재 결정을 기다리는 CEO다. 정 대표는 박 대표처럼 이번 금융위의 직무 정지 통보를 받진 않았으나 과거 '문책 경고'를 받은 전력이 있어 오는 29일 당국의 징계 결정에 따라 연말 인사에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또 함께 문책 경고를 받은 양홍석 대신증권 부회장을 대신해 '라임 사태 구원투수'로 투입된 오익근 대신증권 대표이사 사장도 내년 3월 임기 만료를 앞 연임에 관심이 쏠린 CEO 중 한 명으로 꼽힌다.
반면 교체보다 연임에 다소 무게가 실린 CEO도 있다. 내년 3월 임기가 만료되는 장석훈 삼성증권 사장은 올해 삼성증권이 전년보다 나은 실적을 기록하고 부동산 PF 등 리스크 관리 등에 탁월했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연임이 유력한 상황이다.
사임 의사가 보류된 황현순 키움증권 대표이사 사장의 거취도 관심이 쏠린다. 황 대표는 지난 4월 SG증권 발 주가조작과 4000억 원대 손실을 발생한 영풍제지 미수금 사태로 리스크 관리에 실패했다는 지적을 받아 책임을 지고 사의를 표명했다. 황 대표의 사직서는 이사회가 결정이 보류된 상태지만 엄주성 전략기획본부장 부사장 등 하마평에 오른 인물들이 차기 키움 수장으로 거론되고 있다.
증권가에서는 이번 CEO 인사가 예년과 완전히 다른 흐름으로 보고 있다. CEO라는 자리에서 회사의 기틀을 닦아온 '올드보이'들이 물러나고 새 인물로 채워지는 분위기가 짙은 만큼 우려하는 이도 있으나, 각 증권사나 자본시장이 과거보다 성장한 만큼 대내외 경영 환경을 바꿀 적기라는 시선도 있다. 유임이 가져오는 안정감보다 변화와 혁신을 시도할 때 따라오는 우려가 낫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한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기존 CEO들이 오랜 기간 회사에 헌신하면서 각 증권사는 물론 국내 자본시장을 성장시킨 인물들로 평가받는 것은 맞지만, 다시 한번 내실을 다져야 할 때가 됐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올해 업계 내 잡음이 유독 많았고 리스크 관리에 실패로 부진한 실적이 이어진 점도 세대교체에 명분을 준다"며 "칼 빼든 문책성 교체나 새 인물에 대한 우려도 있겠으나 시대적 변화와 흐름에 편승하는 분위기가 더욱 짙은 모습이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