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대기업은 대부분 오너 일가가 직접 경영에 개입하는 '재벌 경영'을 하고 있다. 이는 최고경영자(CEO)가 하기 어려운 중대한 기업의 의사결정을 신속히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다만 그 결과에 대한 책임도 져야 한다. 단기적으로는 굴곡이 있지만, 중장기적으로 성장세를 이어가는 대기업들이 오너 경영의 긍정적 사례다. 하지만 오너가 기업 성장의 발목을 잡거나 퇴행시키는 경우도 있다. 이른바 '오너 리스크'가 있는 기업을 차례로 살펴본다. <편집자 주>
[더팩트ㅣ최지혜 기자] 이중근(82) 부영그룹 회장이 지난 8월 경영 일선에 복귀한 지 3개월가량의 시간이 지났다. 하지만 회사 안팎의 기대와 달리 위기상황을 돌파할 뾰족한 경영 전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건설업계에 신사업 바람이 부는 가운데 부영은 영업손실을 내고 있는 기존 임대주택 사업 외에 별다른 사업 다각화 계획이 없기 때문이다. 이 회장이 자리를 비운 동안 회사는 적자기업이 됐고, 시공능력평가액과 재계순위도 뚝뚝 떨어졌다. '초고령 경영자'에 속하는 이 회장은 과연 부영의 탈출구를 찾을 수 있을까.
이중근 회장은 지난 8월 말 부영 회장으로 공식 취임하고 경엉 업무에 복귀했다. 지난 2020년 횡령·배임죄를 확정받은 이 회장은 지난해 3월 형기가 만료됐다. 이후 관련 법률에 따라 5년간 취업이 제한됐다가 윤석열 정부의 광복절 특별사면 대상에 포함되면서 취업 제한이 풀렸다. 이 회장은 1941년생으로 만 82세다.
이중근 회장이 부재하는 동안 부영의 실적은 악화일로를 걸었다. 부영의 전자공시를 보면 그룹의 핵심 계열사 부영주택은 지난해 1148억 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해 적자 전환했다. 매출도 2년 연속 감소세다. 부영주택 매출은 2020년 2조4559억 원에서 2021년 1조6744억 원으로 31.8% 축소됐다. 지난해에는 매출이 전년 대비 66% 급감한 5565억 원으로 쪼그라들었다. 분양수익이 70% 넘게 줄면서 매출이 절반 넘게 감소한 것이다.
실적 악화로 부영주택의 시공능력평가도 크게 떨어졌다. 올해 국토교통부가 발표한 부영주택의 시공능력평가 순위는 93위로, 지난해 35위에서 58계단이나 내렸다. 지난해까지 1조4222억 원이던 부영주택의 시공능력평가액은 올해 77.7% 급락한 3162억 원에 그쳤다.
기존 사업 다각화의 일환으로 추진했던 사업들도 부진한 것은 마찬가지다. 부영그룹 계열사 무주덕유산리조트는 지난해 103억 원의 손실을, 토양정화업을 영위하는 부영환경산업은 4억6000만 원의 손실을 각각 냈다. 해외에서 휴양업을 하고 있는 라오스 법인도 40억 원 적자다.
주요 계열사가 영업손실을 내면서 부영그룹 전체 실적도 적자로 돌아섰다. 회사는 지난해 1425억 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매출도 전년 1조7440억 원에서 6626억 원으로 1조 원 이상 증발했다. 이에 회사의 올해 자산총액은 21조1070억 원으로, 작년 21조7360억 원보다 6300억 원가량 줄었다. 재계 순위도 작년 19위에서 올해 22위로 밀려났다.
◆ 혁신방안·경영승계 감감무소식…부영 "신사업 추진 계획 없어"
부영의 쇠락은 건설업계 전반의 업황 악화와 무관하지 않다. 당초 회사를 일으켜세웠던 사업부문이 임대주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대형 건설사들의 사정은 좀 다르다. 변화를 위한 혁신을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주택사업 수익성 감소는 물론, 수익구조 개편에 실패한 중소 건설사들의 구조조정이 잇따르고 있는 건 비슷하지만 신사업 진출과 혁신사업으로 탈출구를 찾고 있다.
대기업들은 주택사업에서 벗어난 포트폴리오 개선으로 활로를 찾고 있다. SK건설은 SK에코플랜트, 포스코건설은 포스코이앤씨로 사명을 바꾸면서 환경·에너지 기업으로 체질개선에 나섰다. 또 GS건설은 수처리사업, DL이앤씨는 소형모듈원전(SMR) 등을 필두로 신사업을 발굴하고 있다.
건설업계의 경영진 세대교체 움직임도 활발하다. 현재 대형 건설사 최고경영자(CEO) 가운데 1940년대 출생자는 전무하다. 시공능력평가 상위 10대 건설사 수장들 가운데 최고령자는 1957년생 윤영준 현대건설 대표이사다. 최근에는 허윤홍 GS건설 사장이 새롭게 '40대 CEO'로 선임되면서 젊은 경영자로 나서기도 했다.
대형 건설사 관계자는 "경영진과 이사진의 세대교체는 경영 혁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대외적으로 변화하는 기업 이미지를 형성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며 "고령의 CEO나 회장은 보통의 경우 정체된 기업 이미지를 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와 달리 회사 지분 93.79%를 들고 있는 이중근 회장의 경영 승계 의지는 뚜렷치 않다. 한때 이 회장이 건강 악화를 호소하면서 승계설이 나오기도 했다. 이 회장은 지난 2018년 배임·횡령 혐의로 검찰조사 당시 구속기소되자 고령과 건강악화를 들어 보석을 신청했고, 이어 2020년에도 같은 혐의로 구속 위기에 처하자 건강상 이유로 집행 정지를 신청했다.
업계는 이중근 회장이 슬하의 4남매 중 누구에게 경영 지휘봉을 넘겨줄지에 주목하고 있지만 지분만으로는 차기 CEO를 점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 회장의 부영 지분율은 지난 2012년말 74.18%에서 10년 만에 20%포인트 가량 증가해 사실상 '1인 체제'가 됐다. 반면 장남 이성훈 부영주택 부사장의 부영 지분은 2.18%에 불과하다. 이외에 차남 이성욱 천원종합개발 대표, 삼남 이성한 부영엔터테인먼트 대표, 막내딸 이서정 부영주택 전무 등의 그룹 계열사 지분은 미미한 수준이다.
현재로선 유일하게 경영 활동에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이서정 전무의 승계 가능성이 가장 높게 가늠되고 있다. 그러나 이마저 여부와 시점이 불투명한 상황이다. 이 전무는 지난 2021년 부영 사내이사에 선임된 이후 그룹과 계열사 임원까지 맡고 있다.
문제는 업계 '초고령 경영자'가 경영 일선에 복귀했지만 수익성 개선을 위한 뾰족수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부영 관계자는 "건설경기가 악화했지만 꾸준하게 임대사업을 유지 중"이라며 "이 외에 새롭게 추진 계획인 사업은 없다"고 말했다. 이어 "지난해 분양과 임대공급이 없어 시공능력평가 순위가 내렸지만 당사는 수주전 계획이 없어 이에 따른 큰 영향은 없을 것"이라며 "타사와 달리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도 일으키지 않아 현재로선 유동성 우려도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지난 8월 취임식에서도 경영 방향성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이중근 회장은 취임식에서 "국민을 섬기는 기업으로서 책임있는 윤리경영을 실천해 국민들의 기대에 보답할 것"이라며 "적지 않은 나이지만 역할을 다시 주신 것으로 알고 열심히 기여하겠다"고 말했다.
업계에선 새로운 먹거리를 위한 움직임이 없다면 부영 역시 부도설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한 중소 건설사 관계자는 "아무리 PF나 회사채같은 채무가 없더라도 적자가 이어진다면 부도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고 말했다. 또 다른 건설업계 관계자도 "임대사업이 위험도가 낮아 안정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결과적으로 적자가 난다는 것은 경영상 구조적 문제가 있다는 것"이라고 부연했다.
한편 이중근 회장은 그룹의 적자 탈출을 위한 조직 효율화나 포트폴리오 다각화 등 경영 방향성 제시에는 소극적인 모습이지만, 다방면의 사회공헌 활동에는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지난 5~6월 군 동기와 고향 주민에 사비 현금 1600억 원을 기부했고, 약 1000억 원에 달하는 물품도 기증했다. 무주덕유산리조트는 이달 초 저소득층 대학생에게 4000만 원의 장학금을 전달했고, 창신대에는 그룹 차원에서 재정을 지원해 신입생 전원의 1년치 등록금을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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