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이성락 기자]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가 55년 만에 이름을 변경하고,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는 시스템을 도입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국정농단 사태 이후 위상이 크게 추락한 과거를 씻고 국민의 신뢰를 받는 단체로 환골탈태하겠다는 것이다. 다만 전경련이 바라는 '재계 맏형'으로의 복귀까지는 험로가 예상된다는 의견이 나온다. 위상 회복을 위해선 어떠한 인물이 조직을 이끌지가 중요한데, 차기 회장 선임 작업과 관련해서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을 걷고 있다는 평가다.
20일 재계에 따르면 전경련은 올해 초 미래발전위원회를 만들어 최근까지 다양한 혁신안을 내놓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55년 만에 개명을 결정한 것으로, 전경련은 지난 18일 1961년 설립 당시 사용한 '한국경제인협회'로 이름을 바꾸고 산하 기관인 한국경제연구원을 흡수 통합해 싱크탱크형 경제단체로 탈바꿈하겠다고 밝혔다. 전경련은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국가와 국민들을 먼저 생각하고 실천하겠다는 것"이라고 취지를 설명했다.
전경련은 이 밖에 다양한 혁신안을 내놨다. 정치권력유착 가능성을 차단하고 국민과의 소통을 확대하겠다는 것이 핵심이다. 이를 위해 윤리경영위원회를 설치해 회장과 사무국의 독단이나 정경유착을 막는 시스템을 갖추기로 했고, 한국판 '버핏과의 점심식사' 성격인 '갓생(목표 달성을 위해 생산적이고 계획적인 생활 루틴을 실천한다) 한 끼'와 같은 행사를 통해 기업인들과 젊은 세대 간 소통의 장을 만들어 시장경제 교육에 나설 계획이다.
전경련이 이처럼 쇄신 의지를 드러내는 건 부활에 본격 시동을 거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전경련은 그동안 한국 재계의 맏형 역할을 해왔지만, 2016년 불거진 박근혜 정부 국정농단 사태에 연루돼 삼성·SK·현대차·LG 등 4대 그룹이 회원사에서 탈퇴하는 등 덩치가 작아졌다. 특히 문재인 정부 시절 적폐로 낙인찍혀 주요 행사에서 배제되는 이른바 '패싱 굴욕'을 겪었다. 그 사이 '재계 맏형' 자리는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이끄는 대한상공회의소에 내줬다.
가장 큰 문제는 비선실세 최순실 씨를 위한 후원금 모금 등 정경유착이었다. 이와 관련해 김병준 전경련 회장 직무대행은 "전경련이 정부 관계에 방점을 두고 회장·사무국 중심으로 운영됐던 과거의 역할과 관행을 통렬히 반성한다"며 "시장이 커지고 시민사회 혁신 역량이 높아지면서 국가 주도보다는 시민사회가 더 중요해졌지만, 정부와의 관계에 치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게 K스포츠·미르재단 사태로 이어지면서 큰 위기에 봉착하는 상황을 낳게 됐다"고 말했다.
위상 회복을 위한 전경련의 최근 발걸음은 비교적 가벼운 편이다. 한일, 한미 정상회담 경제사절단을 주도적으로 꾸리는 등 윤석열 정부 들어 굵직굵직한 일을 맡으며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전경련이 주관하는 행사, 프로그램에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최태원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등 4대 그룹 총수들이 수년 만에 참여하면서 전경련을 대하는 기업들의 태도가 이전과는 달라졌다는 평가도 나왔다.
그러나 전경련을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은 여전히 싸늘하다. 혁신안이 구체적인 실행 단계가 아닌 상황에서 현재까진 이미지 세탁을 위한 구호 수준에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윤석열 후보 캠프 출신 정치인인 김병준 대행을 앞세워 위상 회복을 노리면서 '정경유착 차단'을 외치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는 주장도 있다.
4대 그룹은 아직 전경련 재가입에 대해 그리 긍정적이지 않은 것으로 파악된다. 마찬가지로 전경련을 둘러싼 부정적인 시선 때문이다. 한 기업 관계자는 "어떤 (혁신안) 내용을 발표하는 것보다 어떻게 집행하는지가 중요하지 않겠느냐. 전경련의 상황을 알고 있지만, 기업들은 재가입에 대해 지금 큰 관심이 없어 보인다"며 "명분과 실리가 중요할 것 같은데, 추후 어떻게 명분과 실리가 마련될지 모르겠다. 지켜봐야 할 것 같다"고 밝혔다.
결국 신뢰 회복과 4대 그룹 재가입, 나아가 '재계 맏형' 위상 회복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차기 회장 선임이 가장 중요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존재감이 크고 재계와 시민사회를 두루 아우를 수 있는 '혁신형 인물'이 회장직을 맡아야 대대적인 쇄신 작업이 탄력을 받을 수 있다는 판단이다. 혁신형 인물을 회장으로 선임하는 건 전경련을 이끈 허창수 GS그룹 회장이 지난 2월 물러난 이후 지속해서 제기된 전경련의 핵심 과제였다.
김병준 대행의 남은 임기는 약 3개월이다. 그간 사례를 고려했을 때 차기 회장 선임까지는 험로가 예상된다. 전경련은 허창수 회장 체제에서 새로운 회장을 찾기 위해 노력했으나 후임자가 나타나지 않아 어려움을 겪었고, 허창수 회장 퇴임 이후에도 이웅열 코오롱 명예회장 주도로 차기 회장 후보를 물색했지만 재차 실패, 김병준 대행 체제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현재 재계에서는 정의선 회장,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등의 이름만 거론되는 중이다. 김병준 대행은 "(차기 회장에 대해) 아직 생각해 본 적 없다"며 "개혁안을 실행하면서 다양한 분들과 접촉할 계획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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