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 | 서재근 기자] 글로벌 전기차 시장 공략에 나서고 있는 국내 완성차 업체들의 셈법이 갈수록 복잡해지는 모양새다. 미국 정부가 시장 예상치보다 훨씬 강력하게 전동화 전환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데다 현지 전기차 보조금 기준마저 까다로워지면서 기존 중장기 전략 수정이 불가피해졌기 때문이다.
◆ "오직 미국 브랜드" 한국·독일·일본 브랜드 모두 보조금 명단서 빠져
18일 완성차 업계에 따르면 미국 재무부와 에너지부 등은 미국 정부가 인플레이션감축법(IRA) 세부 지침에 따른 세액공제 형태의 보조금을 지급받을 수 있는 전기차 16종과 플러그인하이브리드(PHEV) 6종 등 모두 22종의 대상 차종을 발표했다.
IRA는 북미에서 최종 조립되는 전기차에 대해 세액공제 혜택을 제공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미국 정부가 현지에서 판매되는 전기차에 지급하는 보조금은 북미에서 제조·조립한 배터리 부품을 최소 50% 이상 사용했을 경우 3750달러, 미국 또는 FTA(자유무역협정) 국가에서 채굴·가공한 핵심광물을 최대 40% 이상 사용 시 3750달러 등 최대 7500달러다.
이번 발표 명단에는 쉐보레 '볼트'와 '블레이저', 테슬라 '모델3', '모델Y', 포드 '마하 E' 등 미국 완성차 제조사에서 생산하는 전기차들만 이름을 올렸다. 강화된 보조금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 현대차와 기아는 물론 토요타와 메르세데스-벤츠, BMW, 폭스바겐 등 일본과 독일 브랜드는 모두 명단에서 빠졌다. 앨라배마 공장에서 조립 중인 제네시스 'GV70' 전동화 모델의 경우 '북미 생산' 기준을 충족했음에도 중국산 배터리를 사용하고 있어 명단에 포함되지 못했다.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리스 프로그램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전기차 전용 공장 최대한 빠르게 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등 장기 계획에 맞춰 대응하겠다"고 말했다.
이번 미국 보조금 정책이 한국 완성차 업계에 미칠 영향에 관해 업계에서는 "부정적인 시그널로만 볼 수 없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김필수 대림대학교 자동차학과 교수는 "테슬라의 경우 초기 무선 소프트웨어 업데이트(OTA)와 자율주행기술 '오토파일럿' 등 초격차 기술로 독주 체제를 이어갔지만, 현재 현대차그룹을 비롯해 각국 주요 완성차 기업에서 기술력 격차를 좁히거나 일부 역전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어 "다양한 신차와 소프트웨어 경쟁력이 갈수록 커지고 있는 만큼 이렇다 할 신차 출시 없이 단순히 가격 경쟁력만 내세우는 기업과 비교해 현대차와 기아 양사 모두 충분히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고 설명했다.
◆ "빨라도 너무 빨라…" 美 급진적 정책에 업계 '난색'
최근 미국 정부가 발표한 배출가스 규제도 부담 요인으로 꼽힌다. 앞서 미국 환경보호청(EPA)은 12일(현지시간) 차량이 배출할 수 있는 온실가스와 오염물질 기준을 크게 강화하는 내용의 규제안을 내놨다. 규제안에 따르면 오는 2027년부터 2032년까지 생산되는 신차와 트럭의 이산화탄소(CO₂), 비메탄계 유기가스(NMOG)와 질소산화물(NOx), 미세먼지 등의 평균 배출량을 단계적으로 2026년 대비 최대 56% 줄여야 한다.
아울러 EPA는 오는 2030년까지 미국 내 신차 판매의 60%, 2032년까지 67%를 전기차가 차지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완성차 업계는 미국 정부의 이번 발표에 관해 "너무 급진적이다"고 입을 모은다. 올해 1분기 기준으로 미국 자동차 판매량에서 전기차가 차지하는 비중은 7.2%에 불과하다.
현대차와 기아의 경우 지난해 기준 글로벌 시장에서 모두 147만4224대의 차량을 판매했다. 이 가운데 전기차가 차지하는 비중은 5만8000대로 3.9%에 불과하다. 물론 대비에 손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현대차그룹은 지난 11일 경기도 화성시 오토랜드화성에서 열린 국내 최초 PBV 전용 공장 기공식에서 글로벌 전기차 목표 생산량을 오는 2030년까지 364만 대로 제시하고, 글로벌 '톱3' 진입 달성 의지를 드러냈다. 그러나 회사별로 제시한 목표치살펴보면, 현대차는 58%, 기아는 47%로 미국 정부가 제시한 67%에는 못 미친다.
한 국내 완성차 업계 관계자는 "업체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당장 미국 정부가 내놓은 정책 기준에 맞추기 위해서는 아무리 보수적으로 목표치를 산정해도 연간 80~90만 대 이상의 차량을 현지에서 생산해야 한다"며 "여기에 판매량 확대에 절대적인 보조금 부분에서도 상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 놓여 있어 해법을 마련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 '낮추고 또 낮추는' 美 테슬라·中 BYD, 불붙은 가격 경쟁도 부담
북미 전기차 시장이 급변하면서 글로벌 완성차 업체 간 가격 경쟁도 치열해지고 있다. 전기차의 경우 내연기관차량과 달리 각국 정부에서 친환경차에 적용하는 세액공제, 즉 보조금이 차량 판매에 미치는 영향력이 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미 정부의 보조금 정책의 최대 수혜자로 꼽히는 테슬라는 올해 들어서만 세 차례에 걸쳐 주력 모델의 가격을 낮췄다. 앞서 지난 1월 미국과 중국에서 '모델3'와 '모델Y' 가격을 인하한 데 이어 이달 초에도 미국 시장에서 '모델S'와 '모델X'의 가격을 5000달러씩 낮췄다. 이외에도 미국의 포드와 중국의 BYD, 독일의 BMW, 폭스바겐 등도 미국과 중국 등 주요 시장에서 잇달아 가격 인하를 발표하며 공세를 펴고 있다.
반면, 미국 정부로부터 최대 7500달러의 보조금을 받는 테슬라와 포드 등과 달리 국내 완성차 업계는 가격 낮추기 경쟁에 쉽사리 동참하지 못하는 분위기다.
그나마 최근 미국 정부가 IRA 세액공제 대상에 리스 차량을 포함하면서 현대차와 기아는 한국에서 생산된 전기차를 리스 등 상업용으로 현지에서 판매할 때 차량 가격의 30% 또는 유사 내연기관차와의 가격 차이 가운데 더 적은 금액으로 최대 7500달러의 보조금을 받을 수 있게 됐지만, 급한 불을 끄는 수준이라는 게 업계의 평가다.
완성차 업계에서는 가격 경쟁이 전기차 시장판도 변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한국자동차연구원은 전날 '전기차 가격경쟁 시대의 시작' 산업분석 보고서에서 "최근 테슬라발 전기차 가격 경쟁과 BYD, 폭스바겐 등의 보급형 소형 전기차 모델 출시 경쟁이 심화하고 있고, 완성차 업계는 가격경쟁을 통해 시장점유율 확대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가격경쟁이 심화하면서 단기적으로 완성차 업체의 대당 판매 이익이 감소할 것으로 예상되며, 이는 소수의 생존 기업 위주로 전기차 시장 구조가 개편될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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