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간 경계가 사라지는 빅블러(Big Blur·경계 융화 현상) 시대가 성큼 다가왔다. 혁신을 가로막는 규제가 성장 둔화로 이어진다는 비판이 나오면서, 낡은 규제를 과감하게 혁파해야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새 정부 출범 이후 여러가지 규제 완화 방안이 언급되고 있지만, 대내외 운영 상황과 이해관계 대립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창립 20주년을 맞은 <더팩트>가 경제·산업에 반드시 필요한 규제 혁신을 재계·유통·금융의 틀에서 짚어보고 문제를 진단한다. 규제 혁신, 어떤 변화가 있었고, 또 어떻게 평가받고 있는지를 '혁신이 답이다'가 11회 특별기획 시리즈로 조명한다. <편집자주>
[더팩트|최문정 기자] 온라인 플랫폼 업계에 긴장감이 맴돌고 있다. 지난 15일 발생한 SK C&C 판교 데이터센터 화재로 네이버와 카카오 등 주요 기업들의 서비스에 장애가 빚어지며, 업계를 겨냥한 규제가 강화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플랫폼 서비스가 생활에 미치는 영향력을 고려해 적절한 가이드라인 제시는 필요하다면서도, 충분한 검토를 거치지 않은 규제는 경계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 '그때는 틀리고 지금은 맞다'…'카카오사태'에 방송통신발전기본법 개정안 도마 위
지난 15일 오후 3시 19분, 네이버와 카카오 등이 임대해 사용하고 있는 SK C&C 판교 데이터센터에서 불이 났다. 이에 따라 네이버는 포털, 쇼핑, 시리즈온, 파파고 등 주요 4개 서비스, 카카오는 카카오뱅크를 제외한 그룹사 서비스 전반에서 장애가 발생했다.
네이버의 경우, 화재 당일 대부분의 서비스 복구를 완료했지만, 해당 센터에 총 3만2000대의 서버를 맡겨 관리하던 카카오는 사고 발생 후 약 5일 동안 정상화에 어려움을 겪었다. 남궁훈 카카오 각자대표는 지난 19일 이 사태에 책임을 통감하며 대표이사직을 사퇴했다.
정치권은 이번 사태의 재발을 막기 위해 2년 전 폐기된 '방송통신발전 기본법 개정안'을 꺼내 들었다. 이 법안은 통신사와 지상파 방송 등 국가기반시설처럼 민간 데이터센터(IDC)와 주요 플랫폼 사업자의 재난관리에 정부가 개입하는 것이 골자다.
당시 해당 법안은 지난 2018년 발생한 KT 아현지사 화재로 인한 통신 장애를 계기로 발의됐다. 하지만, 이미 IDC가 '정보통신기반보호법'과 '정보통신망법' 등의 법안으로 규제 및 보호받고 있기 때문에 추가 법안이 이중 규제라는 의견에 폐기됐다.
법안을 대표 발의한 조승래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데이터센터 화재 때문에 국민 실생활에 직결된 온라인 서비스 다수가 먹통이 됐고 일상이 멈추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며 "국가의 재난관리 체계를 정비하고 주요 서비스에 대한 대책을 마련함으로써 다시는 이런 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취지를 설명했다.
국민의힘도 지난 18일 유사한 사태를 방지하기 위한 '디지털 정전 방지법'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해당 법안 역시 방송·통신 재난의 발생을 예방하기 위해 방송통신발전 기본법상 방송통신재난관리기본계획의 수립·시행 대상에 부가통신사업자 등을 포함하고, 주요 데이터를 보호하기 위한 이중화 및 이원화에 관한 사항이 추가됐다.
윤석열 대통령도 지난 17일 카카오의 서비스에 대해 "민간기업에서 운영하는 망이지만 사실상 국민 입장에서 보면 국가 기간 통신망과 다름없다"며 "독점이나 심한 과점 상태에서 시장이 왜곡되거나, 이것이 국가의 어떤 기반 인프라와 같은 정도를 이루고 있을 때는 국민의 이익을 위해 당연히 국가가 제도적으로 필요한 대응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폐기 수순 밟던 '온플법' 논의도 급물살
안팎의 우려 속에 윤석열 행정부 들어 자율규제로 가닥이 잡혔던 '온라인 플랫폼 중개 거래의 공정화에 관한 법률안' (이하 온플법) 역시 이번 카카오 사태를 계기로 재조명되고 있다.
온플법은 온라인 플랫폼 기업이 입점업체와의 계약에서 우월한 지위를 남용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공정거래위원회가 입법 추진한 법안이다. 특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발생 이후 온라인 쇼핑이나 배달 등 비대면 경제활동 비중이 높아지며 논의에 속도가 붙었다.
온플법은 네이버, 카카오, 쿠팡, 구글, 애플, 배달의민족, 야놀자 등 18개 기업을 대상으로 한다. 핵심 내용은 △필수기재사항을 명시한 계약서 작성·교부 의무 △계약내용변경 시 사전통지 의무 △불공정행위 금지 등이 있다.
한국인터넷기업협회는 입장문을 통해 "플랫폼 산업은 예측이 불가능할 정도로 빠르게 변한다"며 "플랫폼 산업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를 일률적인 규제 형태로 해결하는 것은 실효성이 낮다"고 지적했다. 이어 "글로벌 경쟁이 필연적인 디지털 환경에서 국내 주요 플랫폼은 도전자 위치에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온플법은 지난 8월 더불어민주당이 국회의원 워크숍을 열고 온플법을 민생입법 과제로 발표하며 다시금 주목받기 시작했다. 여기에 최근 불거진 '카카오사태'로 인해 국민의힘의 지지도 얻어가고 있다.
지난 20일 중소기업중앙회를 방문한 성일종 국민의힘 정책위원장은 "온플법은 중소기업에 꼭 필요한 법"이라며 "더불어민주당도 관련 법안을 제출한 만큼 협의해서 통과시킬 수 있도록 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플랫폼 업계의 독과점을 방지하기 위한 논의도 나오고 있다. 21일 공정위는 '독과점 온라인 플랫폼 시장의 경쟁 촉진 방안'을 대통령실에 보고했다고 밝혔다. 공정위는 올해 연말까지 '온라인 플랫폼 독과점 심사지침'을 제정하고, 이에 따라 △멀티호밍 제한 △최혜대우 요구 △자사 우대 △끼워팔기 등 대표적 위반행위 유형을 제시할 전망이다.
또한 플랫폼의 무분별한 인수합병(M&A)을 차단하기 위해 '기업결합 심사기준'을 개정에도 나설 예정이다.
공정위 관계자는 "카카오 사태가 시장 내 경쟁 압력이 없는 독점 플랫폼이 혁신 노력과 사회적 책임을 소홀히 한 것에 기인한 측면이 있다는 점에서 플랫폼의 독과점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맞춤형 제도개선을 추진하고, 독과점력을 남용한 위법행위에 대해서는 엄정히 조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 플랫폼 혁신 가로막는 '보복성 입법' 관행 멈춰야
전문가들은 최근 플랫폼 업계를 둘러싼 법안이 힘을 받는 데 대해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사업 추진에 있어 문제가 생기는 부분은 정부와 기업의 가이드라인 점검과 기존 법안의 보완 등으로 접근해야 신산업의 혁신을 저해하지 않을 수 있다는 설명이다.
김태윤 한양대 행정학과 교수 겸 경제 규제혁신 태스크포스(TF) 민간팀장은 "한국의 경우, 정부의 규제는 옛날의 '굴뚝산업' 시절의 분류에 머물러 있어 플랫폼 기업들이 추진하는 개성 있고 다양한 사업 아이템이 이 분류에 담기지 못하는 회색지대 시기를 겪곤 한다"며 "최근에는 사회가 굉장히 빠르게 변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회색지대가 더욱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고 우려의 목소리를 전했다.
김 교수는 이어 "온플법과 비슷한 법안을 통과시킨 미국의 경우, 메타, 구글, 애플 등 자국의 글로벌 빅테크 기업을 대상으로 해당 법안을 시행하고 있다"며 "이렇게 커다란 기업이 전체 온라인 플랫폼 업계의 혁신과 스타트업의 탄생을 막으면 안 된다는 측면에서는 규제가 필요하지만, 온플법은 너무 촘촘한 기준을 마련해 온라인 생태계 자체를 고사시킬 위험이 있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카카오 사태와 같은 사고에 '보복성 입법'을 발의하는 관행도 멈춰야 한다고 지적했다. 사태를 둘러싼 여러 이해관계와 한계 등을 살펴 실질적인 재발방지책이 마련돼야 한다는 설명이다.
유병준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는 "민간 기업들의 서비스가 제대로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정부는 그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할 수는 있지만, 법적 규제를 논하는 것은 과한 조치"라고 비판했다.
유 교수는 "지난 19일 남궁훈 전 카카오 각자대표가 이번 '카카오 먹통' 사태는 'IT업계의 비극'이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다른 것보다 국내 인터넷 기업들이 사업을 하는 데 정부와 법안이 협조적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 것"이라며 "오히려 이번 사태를 통해 정부가 카카오를 포함한 인터넷 기업들이 데이터센터를 구축하는 데 있어서 전기·통신 인프라 확보 등을 공정하게 얻고 있는지, 구글과 메타 등 글로벌 기업들이 자국에서 누리는 만큼의 편의를 제공받고 있는지 점검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현수 대한상의 경제정책팀장은 "현 정부도 네거티브 규제를 얘기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결국 실패했다는 것은 그만큼 쉽지 않다는 것"이라며 "고착화된 규제를 얼마나 의지를 갖고 개선하려는지 산업계에 지속적인 신호를 줘야 하고, 실제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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