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간 경계가 사라지는 빅블러(Big Blur·경계 융화 현상) 시대가 성큼 다가왔다. 혁신을 가로막는 규제가 성장 둔화로 이어진다는 비판이 나오면서, 낡은 규제를 과감하게 혁파해야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새 정부 출범 이후 여러가지 규제 완화 방안이 언급되고 있지만, 대내외 운영 상황과 이해관계 대립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창립 20주년을 맞은 <더팩트>가 경제·산업에 반드시 필요한 규제 혁신을 재계·유통·금융의 틀에서 짚어보고 문제를 진단한다. 규제 혁신, 어떤 변화가 있었고, 또 어떻게 평가받고 있는지를 '혁신이 답이다'가 11회 특별기획 시리즈로 조명한다. <편집자주>
[더팩트ㅣ정소양 기자]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면서 산업계 전반에서 규제 완화 분위기가 풍기고 있다. 정부가 금융권의 해묵은 과제인 금산분리 규제를 완화하겠다고 나서면서 금융권이 일제히 환영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19일 금융권에 따르면 정부는 '낡은 규제'인 금산분리법을 완화하겠다는 방침이다. 금산분리법은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이 상대 업종을 소유 또는 지배하는 것을 금지하는 원칙이다. 1991년 '금융기관의 합병 및 전환에 관한 법'이 제정되고, 1995년 은행법에도 은산분리 내용이 포함되면서 관련 규제가 시작됐다.
관련법에 따르면 비금융사는 은행 주식을 4%까지만 보유할 수 있으며, 의결권을 행사하지 않는 조건으로 금융당국 승인을 얻은 경우에는 10%까지만 보유할 수 있다. 은행도 비금융회사의 지분을 15% 이상을, 보험사는 계열사의 지분 중 총자산의 3% 이상을 보유할 수 없다. 또한, 은행과 보험회사는 비금융사의 주식을 15%까지만, 금융지주회사는 비금융회사 주식을 아예 소유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금융과 산업이 결합될 경우 공정 경쟁 저해, 정보 독점 문제, 연쇄 부실 가능성, 대주주와 소액주주간 이해 상충문제 등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으로 금산분리 정책이 시행됐으나 그간 금산분리로 인해 금융과 산업의 결합을 통한 시너지 효과를 막고, 은행업의 경쟁력을 약화시킨다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 금융위, '금융규제혁신위원회' 출범 등 규제 개선 논의 착수
최근 들어 금융권에서 '금산분리'가 뜨거운 감자가 된 것은 규제 혁신을 선언한 윤석열 정부가 금산분리를 재검토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주현 금융위원장 역시 취임 전부터 규제 완화에 적극 나서겠다고 천명했다. 김 위원장은 취임 당시 기자간담회에서 "우리 금융산업이 다른 곳은 드론을 띄우는데 우리도 띄우고 싶다면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그 과정에서 금산분리 때문에 안 된다고 하면 금산분리 완화를 검토해야 한다. 과거 전통적 틀에 구애받지 않고 과감히 개선하겠다"라고 밝혔다.
최근에도 김 위원장은 과감한 규제 혁신 추진을 강조했다.
그는 "현재의 금융 관련 법령은 대부분 아날로그 시대에 제정됐다"며 "법체계가 금융산업의 디지털화를 뒷받침하려면 제도적인 보완이 시급하다"라고 했다. 또한 "일각에선 정부가 금산분리를 깨려고 한다는 비판이 나오는데 금산분리 완화 자체가 금융위의 목적은 아니다"며 "금산분리를 지켜야 한다는 원칙이 금융의 디지털화를 가로막아선 안 된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넘어야 할 관문은 많다. 금산분리는 공정거래법, 은행법, 보험업법 등 다양한 법에 걸쳐서 적용되고 있기 때문에 규제 개선을 위해서는 해당 법을 모두 개정해야 한다.
이에 금융위원회는 지난 7월 19일 금융규제혁신위원회를 출범하고 금산분리, 비금융 정보 활용 등 전방위적 규제 개선 논의에 착수했다.
향후 금융위는 36개 금융혁신 세부 과제를 선정하고 금산분리 규제 완화를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우선 금융회사의 자회사 투자와 업무범위 제한 개선을 검토한다. 규제혁신 안에는 은행이 15% 이내 지분투자만 할 수 있는 비금융 자회사 투자 제한 완화, 업종 제한 없이 자기자본 1% 이내 투자 허용 방안 등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금융권, 신사업 진출 활로 모색에 반색…일각선 우려의 목소리도
금산분리가 완화되면 금융사들은 다양한 신사업에 직접 진출할 수 있게 된다. 그동안 법에 가로막혀 지분투자나 제휴에 그쳤던 협업 규모를 더욱 확대하거나 관련 스타트업 인수 등 신사업 진출도 활기를 띠게 될 전망이다.
KB국민은행의 알뜰폰 '리브엠'과 신한은행의 배달앱 '땡겨요'가 대표적 사례다. KB국민은행과 신한은행은 각각 알뜰폰 서비스인 리브엠과 배달앱 땡겨요를 운영하고 있지만, 이들은 혁신금융서비스에 선정된 것이라 약 5년 뒤 당국으로부터 혁신성을 인정받지 못하면 더 이상 사업을 이어 나가지 못한다.
금산분리 완화가 현실화되면 해당 분야 사업들을 지속할 수 있게 돼 다른 은행들도 앞다퉈 신사업에 뛰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현 규제는 전통 은행권에 불리한 면이 많았다"라며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형평성 문제가 꾸준히 제기돼 왔는데 금융위가 금산분리 등 규제를 완화해준다면 신사업 진출이 더욱 활발해질 것으로 기대된다"라고 말했다.
서지용 상명대 경영학과 교수는 "그동안 금융업은 규제라는 울타리 내에서 디지털 전환과 신사업 진출 등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라며 "(금산분리 완화는) 빅블러 시대에 적절한 방향성이라고 판단된다. 금융혁신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금산분리 완화는 아직 시기상조라는 의견도 나온다. 시대 흐름에 따라 규제를 완화하는 것은 불가피하지만, 지나친 규제 완화는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칫하면 소비자보호 이슈가 불거질 가능성도 있을 뿐만 아니라 플랫폼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소비자보단 회사의 이익이 우선돼 자칫 금융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조연행 금융소비자연맹 회장은 "소비자 후생을 증진하는 규제의 경우 완화해도 좋지만 그동안 소비자 권익 등을 위해 규제해왔던 금융사들의 불편 사항도 '규제 완화'라는 포장을 씌우려는 경향이 있다"라며 "금산분리 완화 등과 관련해서는 소비자 의견을 반영해 규제 개혁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저축은행 사태, 사모펀드 사태 등도 규제를 무분별하게 완화하다 보니 발생한 금융사고"라며 "부작용이 발생하지 않도록 면밀히 따져보고 규제를 개혁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