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 | 서재근 기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5년 만에 직접 피부로 느낀 글로벌 시장의 공기는 한겨울 매서운 바람처럼 차고 무거웠다.
지난 2016년 이후 무려 5년 만의 미국 출장 일정을 소화한 이재용 부회장은 지난 24일 미국 출장을 마친 소회를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 "투자도 투자지만, 현장의 처절한 목소리와 시장의 냉혹한 현실을 직접 보고 오니 마음이 무겁다"고 말했다.
그의 속내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경제계 및 삼성에 정통한 관계자들은 갈수록 치열해지는 업체 간 경쟁을 비롯해 녹록지 않은 반도체 업계의 현주소를 함축적으로 담은 메시지라고 입을 모은다.
실제 글로벌 시장에서 삼성이 마주한 상황을 보자면, 이재용 부회장의 이 같은 우려도 기우가 아닐 수 있다. 이재용 부회장의 이번 미국 출장과 관련해 업계의 눈과 귀는 단연 170억 달러(약 20조 원) 규모의 신규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공장 부지를 어느 곳으로 낙점할지에 쏠렸다.
'삼성전자의 미국 투자 가운데 역대 최대 규모'라는 상징성만으로도 의미가 클 수 있겠지만, 글로벌 시장에서 삼성과 총성 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는 경쟁사들은 이미 한 템포 먼저 '역대급' 투자 계획을 쏟아냈다.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2분기 기준) 52.9%로 삼성전자(17.3%)와 3배가량 격차를 벌린 대만의 TSMC는 앞서 지난 4월 향후 3년간 파운드리 분야에 1000억 달러(약 120조 원)를 투자하겠다고 공언했고, D램 시장 3위 마이크론은 10년간 1500억 달러(약 176조 원)라는 천문학적 자금을 투자에 쏟겠다고 밝혔다.
그렇다고 갈 길이 바쁜 삼성의 앞날에 먹구름만 드리워진 것은 아니다. '사법 리스크'에 장시간 자취를 감췄던 삼성 총수의 글로벌 네트워크도 재가동됐다. 구체적인 실행 계획도 없이 수개월째 표류 중이던 미국 신규 파운드리 공장 부지 선정이 매듭지어진 것 역시 최고의사결정권자의 글로벌 행보가 가져온 성과다.
초를 다투는 기술경쟁에서 발 빠른 신규 투자는 선택이 아닌 필수다. 이 같은 대외환경 속에 기흥·화성↔평택↔오스틴·테일러를 잇는 글로벌 시스템 반도체 생산 체계의 발판을 마련했다는 점은 삼성전자로서는 현재로서 가장 크고 급한 숙제를 해결한 것과 마찬가지다.
사티아 나델라 마이크로소프트 CEO, 한스 베스트베리 버라이즌 CEO, 순다르 피차이 구글 CEO, 누바 아페얀 모더나 공동 설립자 겸 이사회 의장 등 글로벌 파트너들은 물론 백악관 고위 관계자 및 미 의회 위원들과 잇따라 만나 협력 방안을 논의한 이재용 부회장의 글로벌 일정표가 내포한 가치는 돈으로 가늠할 수 없는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다.
불과 3개월 전까지 삼성에서는 이재용 부회장 앞에 '출장'이라는 단어조차 붙일 수 없었다. 올해 초 이재용 부회장이 파기환송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았을 당시 로이터통신 등 다수 외신들이 일제히 '삼성 최고의사결정권자의 부재가 미칠 부정적인 영향'을 집중 조명하기도 했었다.
비록 '반쪽 복귀'라 할지라도 지금은 이재용 부회장의 글로벌 네트워크가 절실한 상황이다. 이번 삼성의 신규 투자를 두고 백악관이 쌍수 벌려 환영의 뜻을 표한 것만 보더라도 미중 반도체 패권 경쟁에서 민간외교의 역할론은 앞으로 더 부각될 수밖에 없다.
당장의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다 하더라도 '취업 제한과 해외 출장 제약 등을 고려한 행정적 배려가 필요하다'는 경제계 안팎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이재용 부회장의 발에 채워진 남은 족쇄를 풀어주는 방안을 검토해야 할 시점임에는 틀림이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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