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자 별세 후 주요인사 맞이하는 시설로 사용
[더팩트|이재빈 기자] 풍산그룹의 창업주 고(故) 류찬우 전 회장의 대저택이 주목받고 있다. 최근 양정철 전 민주연구원장이 미국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 객원 선임연구원으로 합류하기 직전 이곳에서 류진 풍산그룹 회장과 회동을 가졌다는 <더팩트> 단독보도가 나가면서다. 풍산홀딩스가 소유하고 있는 이 건물은 류 회장이 특별한 만남이 있을 때 사용하는 곳으로 알려져 눈길을 끈다.
◆ 담장 높이만 10m…외부 시선 원천 차단
지난 19일과 22일 찾은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에 위치한 풍산 소유의 건물은 철통보안이 이뤄지고 있었다. 입구로 추정되는 목재 대문 앞으로도 거대한 철문이 굳게 닫혀있었고 건물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은 높은 곳의 경우 어림잡아 10m에 달했다. 또 담장이 낮은 부분에는 내부에서 수목을 심어 외부의 시선을 원천 차단했다. 이런 까닭에 주변에 위치한 건물 옥상에서도 건물 내부를 전혀 들여다볼 수 없었다. 철저한 보안과 폐쇄적인 이 건물은 전형적인 재벌가 저택의 모습이다.
건물 입구에는 '북아헌'(北阿軒)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옆으로는 '풍산역사관'이라는 현판이 세로로 달려 있다. 류 창업주가 별세 직전까지 이 저택에 살았던 점을 감안하면 그의 유품들을 보관하고 있는 장소로 추정된다.
인근 공인중개소 관계자는 "관리인이 상주하면서 창업주 유품을 모시고 있는 장소"라며 "북아현뉴타운 지정 당시에도 사업지에 포함되지 않아 개발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라고 귀띔했다.
주민들 사이에서도 해당 저택은 의문의 대상이었다. 인근 아파트 주민 A씨는 "평소 산책하러 자주 다니는 길목이지만 문이 열려있거나 사람이 드나드는 것을 본 기억이 없다"라며 "상당히 오래전부터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건물이라는 것만 알고 있다"라고 말했다. 인근 자영업자 B씨는 "풍산그룹 전 회장이 살았던 집이라고 알고 있다"라며 "저녁에 사람이 모이는 것을 본 기억이 있다"라고 설명했다.
바로 옆 공사현장 관계자들도 해당 건물과 풍산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 현장 관계자는 건물에 대해 문의하자 "풍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라며 황급히 말끝을 흐렸다. 인근에서 50년 이상 거주했다는 주민 B씨는 "가끔 검정색 고급 승용차가 건물 앞에 서있고 수행기사로 추정되는 검은 양복 차림의 사내가 대기하고 있는 것을 봤다"라며 "누군지는 몰라도 거물급 인물이 왔다고 느낄 수밖에 없었다"라고 회고했다.
등기부등본과 일반건축물대장을 보면 이 건물은 지하 2층~지상 3층, 연면적 489.32㎡ 규모로 1975년 사용승인을 받았다. 당초 주택 및 근린생활시설로 사용되며 류 창업주가 직접 거주했다. 이후 1999년 류 창업주가 별세한 후 2000년 풍산으로 소유권이 이전됐다. 2001년에는 용도변경을 통해 근린생활시설로 전환됐다. 이 시점부터 해당 건물을 주요 인사를 맞이하는 '영빈관'의 성격을 띤 장소로 운영한 것으로 추정된다. 서울 부동산정보조회 시스템에 따르면 이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 토지의 공시지가는 지난해 기준 ㎡당 344만4000원으로 3.3㎡당 1136만 원 꼴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방산업계 관계자는 "영빈관 성격의 부동산을 소유한 방산 기업이 있는 줄 몰랐다"면서 "풍산그룹이 정·재계 인맥이 넓어 특별한 장소가 필요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양정철 전 민주연구원장은 CSIS 객원 선임연구원으로 합류하기 직전인 지난달 21일 이곳에서 류 회장과 만남을 가졌다. 업계에서는 풍산그룹이 정재계에 걸쳐 넓은 인맥을 보유하고 있는 만큼 이 건물에서 정재계 거물급 인사와의 만남이 자주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저택은 5호선 충정로역 인근에 있는 풍산그룹 본사와 약 2㎞가량 떨어져 있으며, 자동차로 7분 거리다.
◆ 전직 대통령은 물론 삼성·현대가에도 혼맥 이어져
풍산이 이처럼 철통보안을 자랑하는 건물을 운영하는 배경에는 풍산그룹의 화려한 정재계 인맥이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1989~1990년 풍산의 고문 변호사를 역임했다. 당시 인권변호사로 이름을 떨치던 문 대통령이 노동자 해고로 파문을 불러일으켰던 풍산의 고문을 맡았다는 점은 둘 사이의 관계가 막역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 같은 인연으로 풍산은 문 대통령 당선 당시 '테마주'로 급부상하기도 했다.
류 회장은 '미국통'으로도 유명하다. 2019년 고 노무현 대통령 10주기에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참석한 배경에는 그의 역할이 컸다. 미국 정계에 관계를 구축하고 있는 류 회장이 부시 전 대통령의 초청을 이끌어냈다는 것은 업계에서는 이미 유명한 이야기다. 실제 류 회장은 2018년 아버지 부시 미국 전 대통령의 장례식에도 강경화 외교부 장관 등과 함께 한국측 사절단으로 파견되는 등 '미국통'의 면모를 수차례 보여왔다.
화려한 혼맥도 풍산그룹의 특이점이다. 창업주의 장남 류청 씨는 1982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둘째 딸 박근령 전 육영재단 이사장과 결혼하기도 했다. 류 회장의 처가는 고 노신영 전 국무총리 집안이다. 노 전 총리의 둘째 딸 노혜경 씨와 결혼했다. 노신영 전 총리의 큰며느리인 정숙영 씨는 고 정세영 HDC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의 딸이다. 둘째 며느리 홍라영 씨는 고 홍진기 전 내무장관의 딸로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부인 홍라희씨 의 동생이다. 풍산의 혼맥이 삼성과 현대 등 국내 국내 최상위 재벌가는 물론 대통령 일가 등과도 이어져 있는 셈이다.
더팩트는 해당 건물의 용처와 주요 방문객을 확인하고자 풍산에 지속적으로 문의했으나 담당자가 부재중이라 답변할 수 없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풍산은 재계서열 70위권의 중견 그룹으로 ㈜풍산홀딩스를 주축으로 하는 금속/방산특화 기업이다. 지난해 3분기 기준 18개 계열사를 보유하고 있다. 2019년 기준 2조4510억 원의 매출과 411억 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했다. 1968년 류 창업주가 '풍산금속공업'을 세운 게 시작이다.
파란만장한 시대를 살았던 류 창업주는 명암이 엇갈리는 인물이다. 풍산금속공업 설립 후 1970년부터는 조폐공사에 소전을 납품하기 시작했고 1973년에는 탄약 제조업체로 지정받았다. 류 창업주가 구리 가공에만 집중한 결과 풍산은 세계 3대업체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재계 인맥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곤혹을 치르기도 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혼맥을 성사시키고 전두환 대통령과는 고교 동문이라는 점은 류 창업주가 특혜 의혹을 받는다는 의심의 눈초리를 받게 하기 충분했다. 결국 류 창업주는 5공 비리 청문회 당시 회장에 불려나와 비리 총수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풍산그룹은 현재 동 및 동합금소재와 가공품을 제조·판매하는 신동사업 부문과 각종 탄약류를 생산하는 방산사업 부문으로 나뉜다. 신동사업 부문에서는 동 및 동합금 판·대, 리드프레임재, 동 및 동합금 봉·선, 주화용 소전 및 동 지붕재 등을 생산하고 있다. 특히 동전 제작을 위한 소전은 세계 70여 개국에 수출되고 있으며 세계 시장의 50~60%를 점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방산사업 부문에서는 소구경에서부터 대구경까지 이르는 각종 군용 탄약과 스포츠용 탄약, 추진화약 및 탄약 부분품, 정밀 단조품 등을 생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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