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조 반발은 과제
[더팩트│황원영 기자] 보험사가 제판(製版)분리에 속도를 내고 있다. 보험 상품의 제조와 판매를 분리함으로써 경영 환경과 시장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기 위해서다. 대형 GA(법인보험대리점)가 보험를 위협하고 있는 현실도 제판분리를 가속화하고 있다. 다만 노동조합이 제판분리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는 점은 변수다.
24일 보험업계에 따르면 미래에셋생명에 이어 한화생명도 제판분리를 공식 선언했다. 고령화·디지털화 등 급격한 환경변화로 소비 패턴이 급변하는 상황에서 전속 채널 중심의 운영 전략은 상품 경쟁력이나 다양성 확보에 한계가 있다는 위기의식이 퍼져서다. 대형 보험사가 자회사형 GA를 만들면 자금 규모나 영업망 등에서 기존 GA를 앞서나갈 수 있다.
제판분리 흐름을 본격화한 건 생명보험업계 5위인 미래에셋생명이다. 미래에셋생명은 내년 3월을 목표로 자사 전속 설계사(CFC·FC) 3300여명을 GA인 미래에셋금융서비스로 이동하는 제판 분리를 추진하고 있다. 미래에셋금융서비스는 GA 강화를 위해 최근 하만덕 미래에셋생명 부회장을 신임 대표로 선임하기도 했다. 하 부회장은 GA 고유의 상품 비교 분석 역량과 그룹의 디지털·마케팅 역량을 결합해 영업력을 강화하는 한편 다양한 금융 플랫폼과의 제휴를 추진할 예정이다.
미래에셋생명은 앞서 보험 설계사 신분으로 영업 성과에 따라 성과 보수를 받는 사업가형 지점장 제도를 전면 도입했고 2014년 자회사형 GA인 미래에셋금융서비스를 설립하며 제판 분리를 위한 제반 여건을 마련했다. GA로 이동하는 FC와 CFC에게는 기존 전속 채널과 같은 업무 인프라를 제공하고 다양한 보험 상품과 금융 서비스를 취급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판매 조직 분리 이후에는 상품개발·마케팅·언택트 인프라 구축에 집중할 계획이다.
업계 2위인 한화생명 역시 제판분리 흐름에 동참했다. 한화생명은 지난 18일 임시 이사회를 열고 전속 판매 채널을 물적분할로 분사해 내년 4월 1일 자회사형 법인보험대리점(GA) 한화생명 금융서비스㈜(가칭)를 세우는 안건을 의결했다. 신설 GA는 한화생명의 100% 자회사다. 물적분할 방식을 선택한 만큼 영업관리인력도 인위적인 구조조정 없이 현재 그대로 이동한다. 근로조건도 현재와 동일하다.
한화생명 금융서비스가 설립되면 약 540여개의 영업기관, 1400여명의 임직원, FP만 2만명에 달하는 초대형 판매전문회사로 도약하게 된다. 현재 관련 업계에서 설계사를 가장 많이 보유한 곳이 1만5000여명 수준임을 감안했을 때, 단숨에 업계 1위로 올라서는 것이다. 자본금 규모 면에서도 독보적이다. 신설되는 판매 전문회사의 총자본은 6500억 원이다.
한화생명은 신설 판매전문회사 설립으로 규모의 경제 시현을 통한 수익 안정화로 기업가치 증대 및 지속 성장의 기반을 마련한다는 계획이다. 이를 통해 △업계 1위 초대형 판매전문회사로 도약 △규모의 경제를 통한 연결손익 극대화 △무형자산에 대한 밸류에이션으로 기업가치 향상 △제판분리 선제적 대응을 통한 시장 선도 등의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이 밖에 푸르덴셜생명과 농협생명 등도 GA 자회사 설립이나 확대를 추진하고 있다. 손해보험사 역시 판매 채널 전문화에 나섰다. 현대해상의 경우 최근 이사회를 열고 자회사형 GA를 설립하기로 했다. 전속설계사 및 지원부서 전체를 이동시키는 제판분리는 아니지만 GA 설립을 통해 영업경쟁력과 효율성을 높인다는 계획이다. 현재 자회사형 GA를 두고 있는 손보사는 삼성화재, DB손해보험, AIG손해보험 세 곳이다. 하나손해보험도 비슷한 방안을 고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보험업계가 제판분리에 속도를 내는 것은 수익성 확대를 위함이다. 다양한 보험사의 상품을 비교 후 가입하는 흐름이 이어지면서 전문적인 판매 기능이 요구되고 있는 상황이다. 전 보험상품을 모두 취급하는 GA 성장세도 가파르다. 지난해 말 기준 GA 소속 설계사는 23만2453명으로 생‧손보 전속 설계사를 모두 합친 수(18만6922)보다 많다.
내년 1월부터 보험설계사의 첫해 판매 수수료를 월 보험료의 1200% 내로 제한하는 방안도 시행된다. 판매 건당 수수료가 줄어들다 보니 설계사가 여러 회사 상품을 판매할 수 있는 GA로 이동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설계사 입장에서는 소비자에게 여러 보험회사 상품을 비교·판매하는 것이 이익 창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고용보험 의무화와 설계도 제판분리를 부추기는 요소다. 정부는 보험설계사 등 14개 특수형태근로종사자의 고용보험 적용을 내년 7월부터 위무화하기로 했다. 42만명 설계사가 고용보험 의무적용 대상에 포함될 경우 인건비 부담이 커진다. 새 국제회계기준인 IFRS17 도입을 앞두고 재정건전성 확보가 필요한 상황에서 전속 채널을 분리하면 지점 운영이나 설계사 교육비 등의 고정비용 지출을 줄일 수 있다.
보험사는 GA 채널로 판매 주도권이 전환되는 흐름에 대응해 제판분리로 인력 유출을 막고 영업 경쟁력도 높인다는 계획이다. 자회사인 GA의 사업이익이 연결 이익으로 반영될 경우 재무건전성도 높일 수 있다.
제판분리는 우리나라보다 보험시장이 선진화된 미국과 유럽 등을 중심으로 확대되는 추세다. 지난해 기준 GA와 IFA(독립투자자문업자) 등 독립채널 비중은 미국 53%, 영국 71%에 이른다. 업계는 향후 GA 중심의 제판분리가 본격화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다만 분리 대상인 전속설계사와 직원들의 반발은 과제다. 보험사 노동조합은 GA 설립에 반대하고 있다. 특히,고용보험 가입의무화 시행에 앞어 저수익 보험 설계사들을 대상으로 구조조정을 진행하기 위한 포석이 제판분리라는 주장이다. 보험설계사의 근로여건 악화도 노조가 우려하는 부분이다. 사무금융노조 등은 제판분리 시도를 막기 위한 강력한 투쟁을 예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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