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 없는 규제법안 밀어붙이기는 '갑질'이다"
[더팩트 | 서재근 기자] 국내 대표 경제단체장의 수장이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어김없이 국회 문턱을 넘었다. 기업을 옥죄는 법안 추진을 지양하고, 경제계의 목소리를 들어달라고 읍소하기 위해서다.
지난 22일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여야 대표를 만나 상법·공정거래법·금융그룹감독법 개정안 등 국회에서 추진하는 '공정경제 3법'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다. 열 손가락이 모자라도록 국회 문을 두드린 경제단체장의 방문 하루 만에 현 정부는 한발 더 나아가 집단소송제와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확대 도입하겠다며 '화답(?)'했다.
이쯤 되면 말 그대로 대답 없는 메아리다. 수 년째 국내 대기업들이 미국과 중국 간 패권 경쟁 속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직격탄을 맞은 것도 모자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전례 없는 불확실성까지 덮친 시국에 정부와 국회는 사실상 재계와 소통을 단절하는 모양새다.
특히, 집단소송제와 징벌적 손해배상제의 경우 이미 미국 등 다수 선진국에서도 무분별한 소송에 따른 부작용에 시달리고 있는 사례가 적지 않아 대응 마련 필요성이 거듭 제기되고 있는 법안이다. 애초 증권 분야에 한정돼왔던 집단소송제도는 피해자 50인 이상이 대표 당사자로 소송을 제기해서 승소하면 모든 피해자가 같은 효력을 적용받을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더욱이 정부는 집단소송제 도입 영역을 경제계 전반으로 확대하는 것도 모자라 과거에 발생한 사건에 대해서도 소급 적용이 가능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소비자 구제를 수월하게 한다는 순기능 외에도 맹목적인 공격성 소송이나 기업을 대상으로 배상금을 갈취하려는 목적의 흠집내기식 소송이 남발하는 데 따른 부작용을 고려하면, '충분한 협의와 소통이 필요하다'는 경제계의 목소리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개인은 물론 다수 집단 간 갈등의 소지가 있는 사안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이해관계자'의 의견을 수렴하는 것은 상식이다. 그 대상이 대기업이라도 마찬가지다. 문재인 정부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도 '공정한 사회 구현' 아닌가. 소위 잘나가는 대기업도 실적 '반 토막' 위기에 몰린 게 경제계가 처한 현실이다. 반(反)기업 정서를 부추기는 '대기업 패싱'을 정부와 국회가 앞장서 조장하는 현실 속에서 나라에 보탬이 되는 기업의 자세를 요구하는 것이야말로 갑질이다.
여당 대표를 만나 "정치권은 경제 3법을 개정하겠다는 말만 하고 보완해야 할 문제점이나 대안에 대한 논의는 아직 이뤄지지 않고 있다. 여야가 합의하면 일사천리로 가는 것 아닌가 걱정이 굉장히 많다"고 하소연한 경제단체장의 발언은 단순히 개인의 의사가 아닌 경제계의 목소리다.
송나라 때 구준이 살아가면서 돌이킬 수 없는 여섯 가지 후회를 '육회명'에 담아 말했다고 한다. 정부와 국회가 경제계를 대하는 태도를 보고 있자면, '육회불추(六悔不追)'의 교훈이 생각난다. 관직에 있을 때 나쁜 짓을 하다 실세해서 후회하고, 편안할 때 모르다가 병든 뒤 후회하듯 생사기로에 놓인 기업들이 하나둘씩 쓰러지고 나서야 지난 결정에 탄식한들 그때는 돌이킬 수 없다.
likehyo85@tf.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