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부회장, 행동으로 보여준 '총수의 선언'
[더팩트 | 서재근 기자] 26년 전인 지난 1993년,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일부 생산라인에서 불량 부품을 칼로 깎아 조립하는 광경을 지켜보고 당시 삼성 사장단과 주요 임원들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호텔로 소집했다.
이 회장은 그룹 내 최상위 경영진을 향해 "삼성은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다. 변하지 않으면 일류가 될 수 없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라며 단호한 메시지를 던진다. 이것이 올해로 26주년을 맞은 삼성의 '신(新)경영 선언'이다.
'회초리'나 다름없었던 삼성의 제2 창업 선언이 느닷없이 재판정에 등장했다. 지난 25일 열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파기환송심 첫 공판에서 심리를 맡은 정준영 부장판사(서울고법 형사1부)는 재판 말미에 몇 가지 당부 사항이 있다"고 운을 떼며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당시 만 51세였던 이건희 회장은 낡고 썩은 관행을 버리고 사업의 질을 높이자며 이른바 '신경영 선언'을 하고 위기를 과감한 혁신으로 극복했다"고 말했다.
이후 재판장이 이 부회장에 던진 질문은 다음과 같다. "올해로 똑같이 만 51세 된 삼성그룹 총수 이재용 부회장의 선언은 무엇이고 또 무엇이어야 합니까?" 혐의의 유무죄를 가늠하는 법리 해석을 내리는 재판부의 이례적인 당부 이후 경제계는 물론 법조계 안팎에서는 '사실상 집행유예 판결을 암시하는 단초'라는 조심스러운 해석을 비롯해 온갖 시나리오가 쏟아져 나왔다. 물론 여기에는 재판부 본연의 역할을 벗어난 '사족(蛇足)'이라는 쓴소리도 포함된다.
재판장도 이 같은 반응을 예상이라도 한 듯 질문에 앞서 "파기환송심 재판 시작된 현 시점에서 재판 진행이나 결과와 무관하다"는 전제를 깔았다. 재판부 '깜짝' 발언의 의도가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재판장이 기대한 것이 '변화와 혁신을 주도하고, 이를 토대로 나라 경제발전을 주도하는 대기업 총수가 되겠다'는 답변이었다면, 이미 그 목적은 달성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듯싶다.
'신경영 선언' 2년 후인 1995년 3월 이 회장은 삼성전자 경북 구미공장 운동장에서 임직원 2000여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출시된 지 5개월밖에 안 된 품질 불량의 휴대전화 15만 대를 쌓아두고 이를 부수고 불태웠다. 처참한 최후를 맞이한 제품은 바로 '갤럭시'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애니콜'의 처녀작 'SH-770' 기종이었다. 이른바 '애니콜 화형식'으로도 불리는 당시 사건은 오늘날까지도 삼성을 글로벌 기업 반열에 올려놓을 수 있었던 체질 개선의 '기폭제'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다.
20여 년의 세월이 지난 삼성은 얼마만큼 달라졌을까. 쓰디쓴 신고식을 치렀던 '애니콜'의 교훈은 글로벌 스마트폰 시장에서 애플의 '아이폰'과 양강 구도를 이루는 '갤럭시' 시리즈로 진화했고, '초격차' 경영 전략 아래 글로벌 반도체 1위 기업으로 도약하는 데 성공했다.
특히, 지난 2014년 부친인 이건희 회장의 와병 이후 사실상 그룹 최고의사결정권자 자리에 오른 이 부회장이 보여준 혁신은 선대의 그것과 매우 닮아있다. 지난 2017년 야심 차게 내놓은 '갤럭시노트7' 발화 사태 직후 삼성이 단행한 대대적인 리콜과 단종 조치가 대표적이다.
강도 차이만 놓고 비교하면 '이재용 체제'가 되려 더 커 보인다. 지난해에는 무려 11년 동안 이어져 왔던 '반도체 백혈병' 사태에 종지부를 찍었고, 같은 해 역대 최대인 180조 원 규모의 대규모 투자 계획도 내놨다.
특히, 올해 들어서는 이 부회장이 전면에 나서 대대적인 변화를 공언했다. 지난 4월 삼성전자 화성사업장에서 치러진 '시스템반도체 비전 선포식'과 지난 10일 아산 탕정 사업장에서 열린 '삼성디스플레이 신규투자 및 상생협력 협약식'에서 이 부회장은 수십수백조 원에 달하는 신사업 투자 계획을 제시하면서 "잘사는 나라를 만드는 데 앞장서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재계 내 역할에서도 뚜렷한 변화를 보였다. 이 부회장은 지난 6월 방한한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의 승지원 회동을 주관한 데 이어 열흘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서 일본 최대 소프트웨어 유통회사이자 IT 투자기업인 소프트뱅크 수장 손정의 회장과 주요 그룹 총수들과 만남을 주도하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이 같은 민간 외교는 실제 가시적인 성과로도 이어지고 있다. 최근에는 전체 면적 334㎢로 서울시(605㎢)의 절반에 달하는 사우디 신도시 건설 프로젝트(키디야 엔터테인먼트 시티 사업)에 에 삼성물산이 참여하기로 했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일본 정부의 수출규제 조치 대응을 위해 선대 때부터 이어져 온 대일 네트워크를 총동원하며 민간 외교 전면에 나선 것 역시 부친의 리더십과 닮았다. 여기에 비(非)전자 계열사까지 아우르는 현장 경영까지 더하면 '총수'로서의 활동 영역은 선대보다 더 넓어진 것처럼 보인다.
'혁신경제로 나아가는 데 이바지하라'는 주문에 이보다 더 구체적인 답변이 또 있을까. 이미 답변은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줬다. 나라를 대표하는 대기업으로서, 그 기업의 최고의사결정권자로서 삼성과 이 부회장의 역할은 제 기능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과제는 무엇일까. "나라 경제를 늘 이끌어 줘서 감사하고, 과감한 도전을 응원한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메시지처럼 이제는 정부가 앞장서 기업이 추진하고자 하는 변화와 혁신이 원활하게 이뤄질 수 있는 외부 환경을 조성하는 게 순서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