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강력한 '대일 카드'는 한국 기업 경쟁력 강화...경영 환경 개선 필요
[더팩트 | 서재근 기자] 국내 주요 그룹 수뇌부가 또다시 청와대의 부름을 받았다.
8일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이 일본 정부의 수출 규제 초치에 관해 경제계 목소리를 듣겠다며 5대 그룹 전문경영진(윤부근 삼성전자 부회장, 권영수 LG그룹 부회장, 황각규 롯데그룹 부회장, 공영운 현대차 사장, 김준 SK이노베이션 사장)과 오찬 회동을 가졌다.
일본이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안보상 수출우대국)'에서 제외하는 초유의 사태가 현실화한 외부 상황을 고려하면 정부 정책 컨트롤타워인 김상조 정책실장과 기업인들 간 회동은 타이밍이 꽤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러나 재계 안팎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현장에서 만난 대기업 고위 관계자들은 하나 같이 "정부의 잦은 (총수 및 최고경영진) 호출에 피로도가 극심하다"고 입을 모은다.
최근 정부가 기업인들을 소집한 횟수를 세어보면 이 같은 볼멘소리도 결코 엄살로 느껴지지 않는다. 지난달 7일에는 홍남기 경제부총리와 김상조 정책실장이 현대차와 SK, LG그룹 총수와 면담했고, 3일 후인 같은 달 10일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30대 그룹 총수들을 청와대로 소집했다.
김상조 정책실장과 5대 그룹 전문경영진 회동에 이어 광복절을 앞두고 문 대통령이 다시 주요 그룹 총수들과 만남을 가질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이를 고려하면 청와대의 기업인 호출은 두 달 새 무려 네 차례에 달하게 된다.
실제 경영환경에 도움이 되는 구체적인 해법만 제시된다면야 모임 횟수는 10번이든 100번이든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까지 드러난 성과는 재계의 불만과 '보여주기식 이벤트'라는 일각의 우려에 충분히 설득력을 더한다.
기업들이 원하는 것은 '이야기를 들어주는 대상'이 아닌 규제와 제도의 틀을 비롯한 경영 환경을 개선하는 '정부라는 관리자의 역할'이다. '초유의 경제 위기'라는 하나의 상황을 바라보는 민관의 온도차는 이미 곳곳에서 직간접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지난달 18일 제주 신라호텔에서 열린 '제44회 대한상공회의소 제주포럼에서 "대기업이 국내 중소기업이 만든 불화수소를 대기업이 외면한다"는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의 발언에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공정에 맞는 제품을 국내 업체가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다"며 작심 발언을 내놓은 것도 결코 개별 기업 총수의 사견(私見)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지난달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30대 그룹 총수 간담회 당시 청와대가 아닌 공항으로 발걸음을 옮긴 것 역시 기업이 인지하는 대외 불확실성에 대한 위기감이 어느 정도인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이미 경제계는 그간 충분히 경제 현황에 대한 목소리를 냈다. 국내 대표 경제단체인 대한상공회의소의 수장을 맡고 있는 박용만 회장이 경제 활성화 및 규제개혁 관련 법안 처리를 촉구하며 국회를 찾은 횟수만 하더라도 20대 국회 들어 12회에 달한다.
수출 규제라는 '칼'을 꺼내든 일본에 대한 최선의 대응은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을 벌이는 국내 기업들의 경쟁력을 높이는 방법뿐이다. 정부는 일본의 수출 규제 조치로 우리 기업들이 받는, 또는 받을 피해에 대한 현실적인 지원 방안을 모색하는 데 집중하고, 기업 경영에 도움을 줄 수 있는 현실적인 규제와 제도 개혁에 속도를 높여야 한다.
"긴장은 하되 두려워 말고, 지금의 위기를 극복하자"(이재용 부회장)는 재계 서열 1위 그룹 총수의 메시지도 "흔들림 없이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위기에 슬기롭게 대처하자"(최태원 회장)는 4대 그룹 총수 '맏형'의 독려도 정부 차원의 적극적인 지원 없이는 그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 새로운 판이 열렸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기 위해서는 정부의 기업관부터 바꿔야 한다. 가장 강력한 '반일 카드'는 바로 우리 기업의 경쟁력 강화임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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