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구의 상암토크] '백년대계' 에너지정책, '엿장수 마음대로'인가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은 여름철 전력수요 급증에 대비해 정비 중인 한빛 3호기와 한울 2호기(사진)를 전력 수요 피크 기간인 8월 둘째, 셋째 주 이전에 재가동할 계획이다. 원전이 추가 가동되면 국내 원전 이용률이 8월에는 80%까지 치솟을 전망이다./더팩트DB, 한울원전 제공

전력수요 폭증하자 원전에 손내민 '탈원전 정부'...확증편향 벗어나 현실적 전력수급 계획 절실

[더팩트ㅣ김민구 기자] 폭염의 위력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경북 영천 등 일부 지역 낮 수은주가 24일 40도를 넘는 등 한반도 전역이 가마솥처럼 펄펄 끓고 있다. 생지옥이 따로 없다. 이러다 보니 만나는 사람마다 화젯거리 1순위는 단연 폭염이다. 폭염을 식혀줄 비구름을 부르는 기우제(祈雨祭)라도 지내고 싶은 심정이다.

폭염이 계속되면서 전력수요는 24일 사상 최고치를 갈아치웠다. 전력공급 예비율도 8% 아래로 떨어졌다. 전력공급 예비율은 쉽게 말하면 여유전력이다. 예비율은 보통 10%를 넘어야 안심할 수 있다. 그런데 예비율이 한 자릿수로 내려간 것이다. 정부의 전력공급 계획에 빨간불이 깜박인다.

이 정도면 정부가 비장의 카드를 내놔야 한다. 아니나 다를까 정부가 최근 에너지 대책을 발표했다. 그런데 정부 대책을 듣는 순간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에이, 설마' 하는 마음이었다. 정부가 '원자력발전 카드'를 다시 만지작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폭염으로 전기 수요가 급증하자 원전 재가동을 앞당기기로 했다. 이에 따라 현재 원전 24기 중 가동 원전은 21일 발전을 재개한 한울 4호기를 포함해 모두 17기다. 원전 가운데 60% 이상이 다시 기지개를 켠 셈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한국수력원자력은 현재 정비 중인 한빛 3호기와 한울 2호기를 전력 수요 피크 기간인 8월 둘째, 셋째 주 이전에 재가동할 계획이다. 원전이 추가로 가동되면 국내 원전 이용률이 지난 3월 53%에서 폭염이 정점으로 치닫는 8월에는 80%까지 치솟을 전망이다.

그런데 정부의 이번 결정은 파계(破戒)다. 현 정부는 신규 원전 건설 백지화, 노후 원전 수명 연장 불허 등 강력한 탈(脫)원전을 선언했다. 이러다 보니 현 정부에서 원전은 '주홍글씨(The Scarlet Letter)'라는 낙인이 찍힌 지 오래다. 원전을 마치 적폐로 취급한 정부가 전력 수급에 어려움이 생기자 멈췄던 원전을 다시 돌리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집에서 내쫓긴 조강지처에게 "다시 돌아오라"며 구애의 손짓을 보내는 모습이다.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다.

그리스 로마신화 '프로크루스테스(Procrustes)'가 문득 떠오른다. 강도인 프로크루스테스는 지나가는 나그네를 집으로 데려와 쇠 침대에 눕히고 침대보다 키가 크면 다리나 머리를 자르고 키가 작으면 사지를 잡아 늘려 죽였다. 악행을 거듭하던 그는 결국 아테네 영웅 테세우스에게 같은 방법으로 죽음을 당했다. 여기에서 유래한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Procrustean bed)'는 자신이 세운 기준에 다른 사람 생각을 억지로 맞추려는 아집과 편견을 일컫는다.

국내 에너지 정책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다. 정부가 지난해 12월 발표한 제8차 전력수급기본계획(2017~2031년)에 따르면 전체 에너지 공급 가운데 원자력 발전 비중은 30.3%다. 원전은 석탄화력(45.3%)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전기를 생산하는 에너지원인 셈이다.

그런데 정부는 '효자'인 원전의 날개를 꺾었다. 전체 국내 발전에서 원전이 차지하는 비중을 현재 30.3%에서 2030년 23.9%로 낮출 계획이기 때문이다. 석탄화력발전도 45.3%에서 36.1%로 낮춘다. 이에 비해 신재생 에너지 비중을 현재 6.2%에서 3배 이상 많은 20%로 늘리기로 했다.

에너지원을 다양화하는 이른바 '에너지 믹스' 정책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국내 에너지원의 약 97%를 원유 등 수입에 의존하는 국내 현실을 감안하면 에너지원 다양화는 박수칠 만한 일이다.

그러나 국내 에너지 공급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원전 비중을 무리하게 줄이고 신재생 비중을 무려 3배로 늘리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정부가 폭염에 맞서 비싼 석탄화력과 액화천연가스(LNG) 발전소를 전면 가동했지만 폭증하는 전력수요를 감당하지 못한 것은 애초에 탈원전 정책이 무리수였다는 방증이 아니었겠는가.

또한 정부가 재생에너지 비중을 늘리기 위해 산비탈과 저수지 인근에 태양광 시설을 설치하지만 해마다 찾아오는 태풍과 폭우로 산사태가 나면 국민 혈세가 들어간 태양광 인프라도 함께 휩쓸려간다.

정부의 전력수요 예측도 한심하기는 마찬가지다. 정부가 탈원전 논리를 뒷받침하기 위해 전력 수요를 너무 낮게 책정하다 보니 원전가동률을 무려 80%까지 끌어 올리는 웃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지구온난화의 여파로 지금 한반도를 강타하고 있는 최악의 폭염은 물론 혹한 같은 기상 이변이 잦아지면 이에 따른 냉·온방 수요가 늘어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어디 이것뿐이겠는가. 전기자동차, 로봇 등이 활보하는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전기 수요가 늘어나면 늘어나지 줄어들 가능성은 희박하다. 불과 몇 개월 뒤 전력수요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정부가 이런 중장기 전력 수급계획을 제대로 세웠을 지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2011년 후쿠시마(福田) 원전 사고의 충격으로 한 때 ‘원전 제로(0)정책’을 세웠던 일본도 최근 원전 48기 중 9기를 재가동중이다. 일본이 2030년까지 전체 발전량에서 원전이 차지하는 비중을 현재 2%에서 20~22%로 늘리기로 하는 등 탈원전에서 유턴하는 모습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원자력을 대체할 LNG 수입 증가로 무역적자, 전기요금 인상을 감당할 수 없는 현실적인 고민이 담겨 있는 것 아니겠는가. 또한 일본 사례는 원전의 위험성만 강조한 한국정부의 터널 비전(tunnel vision)을 꼬집기에 충분하다.

정부는 백년대계인 에너지정책 정책을 펼칠 때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의 함정에 빠져서는 안 된다. 자신의 신념과 일치하는 정보는 받아들이고 신념과 다른 것은 무시하는 것은 그릇된 집단사고에 매몰되는 위험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만의 도그마에 빠져 현실의 문을 걸어 잠그는 것은 시대를 거꾸로 거슬러 가는 퇴행적 행태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역사가 이미 입증하고 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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