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구의 상암토크] '벽돌폰'과 경로의존성, '그 죽음의 칵테일'

한 때 휴대폰 시장의 절대 왕자로 군림했던 모토로라는 경로의존성 함정에 빠져 기술혁신을 일궈내지 못해 끝내 침몰했다. 사진은 그렉 로처(왼쪽 세 번째) 모토로라 모빌리티 영업이사가 지안 치아오(왼쪽 네번째) 중국 레노버 수석부사장과 2014년 10월 31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축하연에서 건배를 하고 있는 모습. 레노버는 2014년 10월 30일 구글로부터 모토로라 모빌리티 인수를 완료했다. 사진=신화/뉴시스

모토로라 '벽돌폰' 신화에도 역사적 뒤안길...경로의존성 타파하는 기술혁신이 답

[더팩트ㅣ김민구 기자] 1988년 7월 1일 사람들은 서울의 한 곳에 모여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누군가 벽돌 같은 기계를 들고 다니면서 집 밖에서 전화 통화를 하는 모습이 연출됐기 때문이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휴대전화 서비스가 우리나라에 첫 선을 보인 것이다. 휴대전화는 당시 전화에 대한 기술 수준과 통념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블랙스완(Black Swan:가능성은 낮지만 발생하면 엄청난 파급효과를 가져오는 사건)’이 현실로 다가왔다. 상전벽해(桑田碧海)도 이런 상전벽해가 따로 없었다.

당시 한국 국민의 관심을 모은 첫 휴대폰은 미국 제조업체 모토로라(Motorola)가 만든 '다이나텍8000X'였다. 다이나텍8000X는 무게가 771g으로 삼성전자 갤럭시S9(163g)보다 거의 5배 무겁다. 또한 이 폰은 10시간 충전해도 겨우 35분 연속 통화하면 방전됐다. 벽돌처럼 두껍고 무거웠으며 성능도 조악한 이 폰이 ‘벽돌폰’으로 불리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다이나텍8000X는 가격이 약 400만원으로 당시 서울 일부 지역 아파트 전세금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이 정도면 입이 쩍 벌어진다. 제품 가격이 너무 비쌌지만 기술혁신에 대한 비용 지불이라고 위안을 삼아야 할까.

‘벽돌폰’ 의 등장은 글로벌 휴대폰 시장에서 모토로라의 전성기를 예고하는 전주곡이었다. 모토로라는 세계 최초로 상용화된 휴대전화를 선보인 데 그치지 않고 1996년 첫 폴더형 제품 ‘스타택’으로 전 세계 시장점유율 40% 이상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위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모토로라는 2004년에는 1억대 이상 팔린 ‘레이저폰’으로 세계 시장을 뒤흔들었다. 기세가 하늘을 찌르는 듯했다.

그러나 '권불십년(權不十年)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했던가. ‘세계 휴대전화의 명가(名家)’였던 모토로라는 시나브로 내리막길로 치달았다. 레이저폰 이후 변변한 후속작 없이 국제무대에서 존재감을 잃어간 모토로라는 그 이후 미국 정보기술(IT) 업체 구글에 인수됐다가 다시 중국 PC 제조업체 레노버에 팔리는 찬밥신세로 전락했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모토로라는 영욕의 부침을 거듭했다. 한 때 세계를 향해 용트림하고 힘차게 포효하던 모토로라가 이제는 쓸쓸하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운명을 맞았다. 씁쓸한 뒷맛이 남는다.

모토로라는 경로의존성(Path dependency)의 희생물이었다. 경로의존성은 기업이 한 번 일정한 경로에 의존하면 나중에 그 경로가 비효율적이라는 사실을 알아도 쉽게 벗어날 수 없다는 얘기다.

모토로라는 스타택과 레이저에 흠뻑 빠져 새로운 트렌드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모토로라는 스타택과 레이저를 통해 제품 ‘슬림(Slim)화’에는 성공했지만 레이저 이후 선보인 스마트폰이 레이저와 유사한 미투(Me, too:모방)제품이었다. 세계 1위라는 승리의 샴페인에 흠뻑 취한 모토로라에게 기술혁신은 빛바랜 휴지 조각이었다. ‘승자의 오만’은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글로벌 IT업계는 3개월이 멀다 하고 첨단 하이테크로 갈아입은 새 제품이 등장하고 기존 제품은 썰물처럼 퇴조하는 게 냉엄한 현실이다. 스마트폰 시장도 예외는 아니다. 기술혁신을 도외시한 채 타성에 젖은 경로의존성만 고집한다면 홍수처럼 밀려오는 첨단기술제품에 떠밀려 표류할 수밖에 없다. 기존 인기 제품에만 집착하는 상품 물신주의(Commodity fetishism)는 기업을 몰락으로 이끄는 ‘처방전’이다.

경로의존성의 교훈을 망각한 이가 어디 모토로라 뿐이랴. ‘잘라파고스(재팬+갈라파고스: 자신들 만의 표준만 고집해 세계시장에서 고립되는 현상)’의 늪에 빠져 허우적댄 소니, 파나소닉 등 일본 IT업체도 기술혁신을 등한시한 채 질곡의 길을 걸었다.

IT업계에서 '졸면 죽는다'는 말이 정설이 된지 오래다. 피를 말리는 글로벌 경쟁에서 ‘틀에서 벗어난’(Think out of the box) 혁신을 한 걸음만 머뭇거려도 나락으로 떨어지는 건 한 순간이다.

모토로라는 ‘벽돌폰’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 못한 채 이번 주 우울한 ‘30주년’ 기념일을 맞았다. 그러나 모토로라의 교훈을 강 건너 불구경 할 때가 아니다. 제4차 산업혁명 시대를 승자의 샴페인에 취해 다가오는 정보기술(IT)혁명에 대비하지 못하면 한 방에 훅 가는 세상이다. 삼성전자나 LG전자도 글로벌 IT업계 대격변에 숨을 죽이고 예의주시해야 한다는 얘기다.

gentlemink@tf.co.kr

Copyright@더팩트(tf.co.kr)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