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평화 정착 위한 역사적 첫걸음...文대통령 중재자 역할 '이제 시작'
[더팩트ㅣ김민구 기자] 34년 전 일이다. 세계 3위 햄버거 체인업체 미국 웬디스는 1984년 1월 10일 독특한 TV광고를 선보여 눈길을 끌었다.
당시 팔순을 훌쩍 넘은 여배우 클라라 펠러는 광고에서 햄버거를 손에 들고 있었다. 햄버거 빵 가운데 쇠고기 패티(햄버거용 고기)가 동전 크기 정도로 작고 초라해 보이자 펠러는 매서운 눈빛으로 패티를 내려다보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일갈했다. "쇠고기는 어디 있어(Where is the beef?)"
웬디스 햄버거는 광고를 통해 자신의 햄버거가 맥도날드와 버거킹 등 경쟁업체보다 패티가 크고 품질이 좋다는 점을 강조했다. TV광고였던 이 문구는 그 후 '만족할 만한 내용이 없다'는 점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자리 잡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12일 싱가포르에서 역사적인 북미정상회담을 갖고 공동합의문울 발표했다. 하지만 뭔가 허전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두 정상이 4가지 합의사항을 이끌어 내는 성과를 거뒀지만 '팥소 없는 찐빵'처럼 밍밍함이 느껴진다. 미국과 북한이 정상회담 개막 하루 전까지 북한의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와 이에 상응하는 완전한 체제 보장(CVIG) 방안을 놓고 머리를 맞댔지만 정상회담 합의문에는 CVID-CVIG에 대한 내용이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클라라 펠러의 불만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개운치 않은 뒷맛을 느끼는 것은 비단 필자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첫술에 배부를 수 있겠는가. 1948년 남북분단 이후 불신과 대립으로 쌓인 상호불신의 벽은 예상보다 높고 견고했다. 70년 세월의 풍파로 더욱 단단해진 난공불락의 벽이 미국과 북한 정상 간의 한 차례 만남으로 허물어지기를 기대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희망일지도 모른다. 그런 것을 현실로 만들어주는 '마술지팡이'는 없다. 이들은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서로 총구를 겨누며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을 연출하지 않았는가.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첫 만남을 통해 세계 최장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한반도 평화정착을 향한 역사적인 첫걸음을 내딛었다는 데 의미를 둬야 할 것이다.
미국과 북한은 1950년 6·25전쟁 이후 하늘 아래 같이 살 수 없는 불구대천(不俱戴天) 원수처럼 서로 으르렁거렸다. 전 세계를 불안하게 만든 미국과 북한의 양국 정상이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아 북한 핵 등 주요 현안에 서로 흉금을 털어놓고 얘기하고 이해하려는 모습은 놀라운 성과가 아닐 수 없다. 북한을 악마로 여기는 이분법적 사고에 몰입한 트럼프 대통령이 김 위원장을 협상 파트너로 삼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점을 맞이한 셈이다.
전쟁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한반도에 미국과 북한 정상이 이번 회담을 통해 평화의 씨앗을 뿌린 것은 박수칠 일이다.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합의한 결과를 제대로 실천한다면 현대사에 한 획을 그을 만한 역사적인 사건이 될 것이 틀림없다. 양국이 70년 적대 관계에 공식적으로 종지부를 찍고 지구상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분단국가이자 냉전 잔재가 남아 있는 한반도에서 평화체제를 마련하는 순간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는 이제 거스를 수 없는 역사적 변곡점을 맞이한 셈이다.
지구상에 마지막 남은 냉전체제가 사라진다면 한반도와 동북아는 물론 전 세계 안보·경제 지형이 요동을 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미국과 옛 소련이 "우리는 더 이상 적이 아니다"고 선언해 냉전체제를 사실상 무너뜨린 조지 H W 부시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서기장의 1989년 지중해 '몰타 선언'이 북미회담 그림자에 가려질 수 있다. 물론 이는 북한이 약속한 완전한 비핵화를 충실히 이행한다는 조건이 달려 있다.
과거에는 상상하지 못한 '뉴노멀(새로운 표준)' 시대가 활짝 열렸지만 미국과 북한이 앞으로 꽃길만 걸을 것이라고 안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앞길에 요철과 굴곡이 수두룩하다. 양국이 아직도 서로를 믿지 못하는 '정보의 비대칭성'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보의 비대칭성은 양측이 갖고 있는 정보에 차이가 있을 때 발생한다. 역선택은 정보의 불균형 때문에 자신에게 불리한 의사결정을 내리는 것을 말한다. 미국과 북한이 상대방에 대한 신뢰가 부족하고 정확한 정보를 갖지 못한 정보의 비대칭성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위기를 맞을 때마다 역선택을 하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런 가운데 김 위원장이 이번 정상회담에서 "그릇된 편견과 관행들이 때로는 우리 눈과 귀를 가리고 있었다" 고 털어놓은 대목은 의미심장하다. 미국과 북한은 이번 합의문을 충실하게 실천해 상호신뢰를 쌓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북한으로서는 김일성과 김정일 정권이 펼쳤던 '살라미 전술' '벼랑 끝 전술'에서 벗어나 보다 진취적인 자세로 미국과 협상하고 이를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신뢰를 쌓지 못하면 변화와 혁신은커녕 현상유지도 어렵다.
북미정상회담이라는 결실이 이뤄지기 까지 중재자 역할을 해온 문재인 대통령도 신발끈을 다시 동여매야 한다. 문 대통령이 최근 간담회에서 "디테일(detailㆍ세부사항)에 악마가 있다"고 밝힌 것처럼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 대장정이 장밋빛 탄탄대로일 수만은 없다. 비핵화 논의에서 얼마든 다시 고비가 생길 수 있다. 문 대통령으로서는 '유리그릇 다루듯'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이번 정상회담이 성사되기까지 한때 북한 측에서 남북 고위급 회담을 무기한 연기하겠다고 돌연 발표하기도 하고 트럼프 대통령이 북미회담 취소를 전격 발표하는 등 여러 우여곡절을 거치지 않았는가. '중재역'이자 '한반도 운전자'를 자임하는 문 대통령으로서는 이번 회담 결과가 충실하게 이행될 수 있도록 북한과 미국을 설득하고 조율해야 한다. 북미정상회담으로 비핵화를 위한 '첫 단추'가 끼워졌을 뿐 본격적 여정은 이제 시작이다.
전 세계는 '은둔국가'의 꼬리표를 떼고 '정상국가'로 향하려는 김 위원장의 일거수일투족을 유심히 지켜볼 것이다. 김 위원장이 싱가포르 초대형 식물원 가든바이더베이에서 웃음을 지으며 '셀카'를 찍고 그를 사진 찍기 위해 몰려든 이들에게 손을 흔드는 모습은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셀카를 찍으며 즐거워하는 김 위원장의 해맑은 웃음이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주체'와 '선군'의 이름으로 남긴 가난과 폐쇄, 고립이라는 유산을 벗어나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인 지도 모른다. 한밤 나들이를 통해 싱가포르의 발전상에 매료된 그가 경제 발전에 매진하겠다면 박수칠 만한 일이다. 싱가포르의 달콤한 여정이 잠에서 깨면 사라지는 ‘한여름 밤의 꿈’이 될지 아니면 비핵화와 개방, 평화, 변영으로 향하는 길이 될 지는 전적으로 그에게 달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