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금 소송전에 정수기 강매 폭로…노사 갈등·과징금까지 악재 잇따라
[더팩트ㅣ안옥희 기자] 정수기‧공기청정기‧에어컨 등 생활가전 렌탈업체 청호나이스가 '갑질' 논란으로 휘청이고 있다.
청호나이스는 최근 설치 A/S 엔지니어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계약서에 서명하지 않는 엔지니어들을 해고하겠다고 협박해 서명을 강요했다는 의혹에 휘말렸다. 이뿐만 아니라 엔지니어들에게 정수기를 강매하는 등 그동안 '갑질'해온 정황이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을 통해 드러나면서 이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잇단 잡음으로 1세대 엔지니어로 정수기 업계 입지전적인 인물로 꼽히는 정휘동(60·사진) 청호나이스 회장의 창업 성공 신화 역시 논란의 도마에 올랐다. 1993년 설립된 '정수기 원조' 업체 청호나이스는 올해 설립 25주년을 맞았다. 정 회장은 1990년대 국내 최초 역삼투압 정수 방식을 소개한 인물로 얼음정수기(2003년)와 커피정수기(2014년)를 업계 최초로 출시하기도 했다. 1991년 미국에서 엔지니어로 활약하던 중 윤석금 웅진그룹 회장의 눈에 띄어 코웨이 연구소장으로 영입된 것을 시작으로 정수기 업체에 발을 담갔다. 그는 평소 인터뷰에서 "얼음 정수기는 기술이 뒷받침되지 못하면 쉽게 만들 수 없는 청호 기술력의 결정체"라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기술 및 엔지니어 우대와 거리가 먼 경영을 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30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정규직 전환을 둘러싼 청호나이스 노사 갈등은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청호나이스 노동조합은 "사측이 사실상 '말장난'과 다름없는 조건부 정규직 전환 계약서를 내세워 엔지니어들을 몰아세우고 있다"며 "서명하지 않은 엔지니어들에게는 부당한 행위를 일삼는 게 다반사"라고 거세게 비판하고 있다.
청호나이스 노조는 또 "최근 퇴직금과 법정수당을 달라는 퇴사자 소송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사측의 자회사 설립을 통한 정규직 전환은 꼼수"라며 청호나이스의 직접 고용을 촉구하고 나섰다.
◆ "퇴직금 소송 원천 봉쇄한 계약서 서명 강요…거부하니 업무 배제"
노조는 지난 29일 오후 청호나이스와 나이스엔지니어링, 본부장 A씨를 부당노동행위로 서울지방고용노동청에 고소했다. 청호나이스 자회사 나이스엔지니어링에 새로 입사하는 엔지니어들 가운데 근로계약서에 서명하지 않은 이들을 사측이 업무에서 배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조에 따르면 본부장 A씨는 엔지니어 B씨에게 계약서 서명을 강요하며 "노조와 상담 후 결정하겠다"는 B씨 의견을 묵살했다. A씨는 또 B씨가 서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압적인 태도로 "내일부터 출근하지 말라"고 협박했다. 또한 A씨는 지난 23일부터 B씨 담당 구역을 다른 엔지니어로 교체하고 아무런 업무도 주지 않는 등 B씨를 업무에서 완전히 배제하고 있다.
청호나이스 관계자는 "계약서 작성 과정에서 서명을 강요한 적 없으며 정규직 전환과 개인사업자 신분으로 남는 것 가운데 본인이 원하는 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며 "실제로 본인 희망대로 개인사업자로 남아 계신 분들도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더팩트>가 입수한 녹취록에 따르면 일부 본부장이 엔지니어들에게 고압적인 태도로 서명을 강요하고 있었다. 녹취록에서 본부장 C씨는 엔지니어 D씨에게 "내가 어제까지 답 달라고 하지 않았나. 나는 회사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거다. 월요일(5월 21일) 18시까지 계약서가 본사로 접수 안 되면 당신 계정이랑 다 뺄 테니까 그렇게 알라"며 서명을 종용했다. 이는 D씨가 서명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업무상 불이익을 받을 수 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앞서 청호나이스는 지난달 28일 자회사 나이스엔지니어링을 설립하고 엔지니어 1700여 명 가운데 희망자에 한해 자회사 소속 정규직으로 전환한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이전까지 청호나이스 엔지니어는 위탁 계약된 개인사업자 신분이었다.
그러나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을 통해 청호나이스가 엔지니어 정규직 전환에 앞서 6개월씩 끊어서 두 번, 이후 또 12개월 등 최장 2년간 근무 평가를 한다는 방침이 알려져 논란이 일었다. 또한 이 과정에서 '개인사업자 기간에 대한 퇴직금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담은 합의서에 서명할 것을 강요한 것으로 알려져 꼼수 논란이 불거졌다.
합의서에 따르면 "수탁자(엔지니어)는 개인사업자 지위에서 위탁자(청호나이스)와 업무 위탁 계약을 체결했고 위탁자의 근로자가 아니기에 퇴직금, 기타 근로자에게 적용되는 일체 수당 청구권이 없음을 확인하며 추후 이와 관련 민·형사·행정상 소송이나 그 밖의 어떠한 이의도 제기하지 않기로 합의한다"고 적혀 있다.
이는 이미 퇴사한 엔지니어들이 퇴직금과 각종 수당을 달라는 소송을 내고 있어 사측이 향후 이 같은 소송 제기 가능성을 원천 봉쇄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사측이 엔지니어들을 근로 감독하며 직원처럼 운영하면서도 노동법상 '노동자성'을 인정하지 않고 자회사 설립을 통한 정규직 전환을 내세우며 퇴직금 청구권을 박탈하려한다는 것이다. 청호나이스는 AS 엔지니어들이 '노동자'에 해당된다는 대법원 판결도 받은 바 있다. 이에 따라 노조는 정규직 전환을 빌미로 한 사측의 각종 꼼수에 대해 서울 고용노동청에 특별 관리감독을 신청했다.
청호나이스 측은 "엔지니어들이 개인사업자이므로 정규직 전환 이전 기간에 대한 퇴직금 지급 의무가 없다"는 기존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 합의서가 앞으로 발생할 수 있는 퇴직금 소송 등 소모적 논쟁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은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 불편해하는 엔지니어들 의견을 반영해 현재는 합의서 작성을 중단했다고 설명했다.
노조는 시용기간이라는 평가 기간을 전제로 한 조건부 정규직 전환과 정규직 전환으로 인한 급여변동 등에 문제를 제기하며 지난 26일 본사 앞에서 '증언 대회'를 열어 회사를 규탄하기도 했다.
◆ 청호나이스 "1년 이상이면 바로 정규직" 실상은 시용기간 6개월 평가로 결정
논란이 커지자 청호나이스 측은 1년 이상 근무한 엔지니어들은 바로 정규직 전환이 가능하며, 1년 미만은 12개월의 기간제 계약직 이후 정규직으로 전환한다며 기존 방침을 바꿨다.
청호나이스 관계자는 "회사가 엔지니어 정규직 전환을 안 해주려고 한다며 비판하는데 사실과 전혀 다르다"며 "고객과 싸우거나 하는 불미스러운 일만 없으면 다 정규직으로 전환된다. 전체 1700여 명의 엔지니어 가운데 현재 88%가 정규직으로 전환해 근무 중"이라고 해명했다.
이 관계자는 "방문판매 업체들에게 방판 인력들은 굉장히 중요하다. 엔지니어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일부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있는데 이 부분을 최소화하기 위해 현재 협의 중"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1년 이상 근무한 엔지니어들은 별도의 절차 없이 곧바로 정규직 전환이 된다는 청호나이스 측 설명과 달리 실제로는 1년 이상 근무자에게 6개월의 시용(평가)기간을 두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해당 취업규칙은 29일 오전 사측이 노조와 대화 후 발표한 것이다.
<더팩트>가 입수한 나이스엔지니어링 취업규칙 부칙에 따르면 1년 이상 근무한 엔지니어는 6개월, 1년 미만은 12개월의 기간제 계약직을 거쳐야한다. 시용 기간 두 차례에 걸친 평가(1차 점수+2차 점수/2)에서 60점 미만을 받으면 정규직 전환이 불가하다. 이들 엔지니어 평가 항목도 객관적이지 않고 자의적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결국 이 시용 평가를 통과하지 못하면 해고될 수 있어 엔지니어들은 고용 불안을 호소하고 있다.
아울러 엔지니어들에게 과도한 영업 압박을 한다는 비판도 이어지고 있다. 엔지니어들은 "신규 사업으로 에어컨 사업을 한다며 직원들에게 1인 1대 구매를 강요한다"며 "극심한 매출 압박으로 수리 대신 세 제품 판매에 열을 올릴 수밖에 없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한 엔지니어는 정수기 구매 압박으로 지난해 5월과 6월 각각 1100만 원, 1200만 원을 본인 카드로 결제한 것으로 확인됐다.
신(新)사업 중 하나인 매트리스케어도 월 1회 이상 판매를 강요한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익명을 요구한 한 엔지니어는 "회사 압박으로 집에 침대도 없는데 매달 매트리스케어 비용으로 2만5000원을 카드로 결제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청호나이스는 노사 갈등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는 가운데 공정위 표시광고법 위반까지 겹쳐 브랜드 이미지도 추락하고 있다. 청호나이스는 최근 공정위로부터 부당 광고로 시정명령 및 신문 공표명령과 함께 1억 2000만 원에 달하는 '과징금 철퇴'를 맞았다.
공정거래위원회(공정위)는 청호나이스가 지난 2009년 12월 8일부터 2015년 6월 30일까지 신문과 홈페이지에 게재한 공기청정기 광고 내용 중 '유해 바이러스 제거율 99.9% 입증' 등의 표현이 소비자를 오도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회사가 지극히 제한적인 조건에서 실시한 실험 결과인데 마치 소비자들이 실생활에서도 같은 성능이 발휘될 것으로 오인할 수 있다는 게 공정위측 설명이다.
렌탈업계 관계자는 "대기업들이 최근 렌탈시장에 잇따라 뛰어들면서 렌탈사업 성장이 둔화되는 상황"이라며 "이에 따라 시장 잠식을 우려한 청호나이스가 엔지니어들을 과도하게 영업으로 쥐어짜는 무리수를 두고 있다"고 지적했다.
청호나이스는 지난 2016년 얼음정수기에서 니켈 등 중금속이 검출되며 불거진 '얼음정수기 안전성 논란'과 업계 경쟁 심화 등으로 정수기 시장에서 입지가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현재 정수기 시장은 웅진코웨이가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청호나이스를 비롯한 후발 업체 SK매직, 쿠쿠 등이 치열한 2위 경쟁을 벌이고 있다. 청호나이스는 신제품 하이브리드 정수기 '도도'를 앞세워 시장 점유율 회복에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다.
비상장사인 청호나이스는 정휘동 회장 지분율이 72.82%에 이르는 '사실상 개인 회사'다. 매출액은 2013년 매출 3117억 원으로 3000억 원을 돌파한 이후 줄곧 3000억 원 대를 유지하고 있다. 청호나이스는 지난해 매출액이 3845억 원, 영업이익이 194억 원을 기록했다. 2010년까지만 해도 9.7%에 달했던 영업이익률은 2013년 2.4%까지 떨어진 후 2~3%대 수준에 머물고 있다.
청호나이스는 주력 사업인 정수기 사업 경쟁이 치열해진 가운데 사업다각화 차원에서 렌탈 방문 판매 시너지를 높일 수 있는 안마의자, 공기청정기, 매트리스, 화장품 사업에도 뛰어들었다. 그러나 청호나이스는 이 같은 다각화에도 뚜렷한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신규 사업으로 밀고 있는 공기청정기는 과장 광고로 공정위에 적발되는 등 악재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