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구의 상암토크] 옥시 가습기 살균제, 대진침대 그리고 '뒷북' 징계

대진침대 일부 제품에서 1급 발암물질 라돈이 검출돼 소비자들 사이에서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사진은 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가 지난 5월 21일 서울 광화문에서 대진침대 피해보상 대책마련을 촉구하는 긴급기자회견 현장. /고은결 기자

업체 안전불감증과 정부의 미온적 대처는 '독이 든 칵테일'

[더팩트ㅣ김민구 기자] 조용히 눈을 감고 한번 상상해보자. 범죄가 창궐하는 우범지대가 있다. 이곳에 유리창이 깨진 자동차와 유리창이 멀쩡한 차량이 있다고 가정하자. 이들 차량을 이곳에 두고 일주일 후에 다시 오면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까.

두 자동차를 비교해 보니 유리창이 멀쩡한 차에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유리창이 파손된 차량은 마치 폭탄을 맞은 듯 쑥대밭이 됐다. 이 차량은 타이어. 배터리, 심지어 자동차 엔진 열을 식혀주는 라디에이터(방열기)까지 도난당하는 수모를 당했다. 차량을 턴 불량배들은 유리창이 깨진 차량을 만만히 봤다. 이들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질문은 이것이 아니었겠는가. "어떤 주인이 차량을 이렇게 방치할까."

위의 사례는 미국 스탠퍼드대 심리학과 교수 필립 짐바르도가 1969년에 실험한 이른바 '깨진 유리창 이론(Broken windows theory)'이다. 건물 주인이 건물의 깨진 유리창을 그대로 방치하면 지나가는 행인은 건물 관리를 포기한 곳으로 여기고 장난삼아 돌을 던진다. 이러다 보니 건물에 있는 나머지 유리창까지 모두 깨진다. 이는 그 지역 범죄율을 높이는 계기가 된다. 결국 그 지역 일대는 더 큰 무질서와 범죄가 들끓는 무법천지로 전락하게 된다.

최근 우리 사회를 뒤흔든 대진침대 파문도 이러한 교훈을 일깨우기에 충분하다. 희토류 광물 '모나자이트' 가루를 함유한 대진침대 매트리스 제품에서 기준치 최대 9배가 넘는 방사선 물질 '라돈(Rn)'이 검출됐기 때문이다. 라돈은 폐암을 일으키는 1급 발암물질이다. 이러다 보니 대진침대 사용자들은 좌불안석일 수밖에 없다. 비싼 돈을 주고 산 침대가 편안한 안식처가 아닌 코와 입으로 발암물질이 들어가는 '살인무기'라면 어느 누가 '발암침대' 파문을 없던 일로 넘어갈 수 있겠는가. 대진침대 사용자들이 사람 목숨이 걸린 문제에 집단소송 움직임을 보이는 것도 별로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여론의 뭇매를 맞은 대진침대가 뒤늦게 리콜 조치에 나섰지만 이 업체를 바라보는 소비자 시선은 싸늘하기만 하다. 대진침대가 언론 보도 후 나흘이 지나서야 늦장 대응에 나서자 이 업체의 무책임과 부도덕성에 소비자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이는 전체 침대제품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다. 기존 침대 업체 에이스 침대, 시몬스, 한샘 등이 자사 제품은 안전하다며 진화 작업에 나서고 있지만 '라돈 포비아(공포증)'는 들불처럼 겉잡을 수 없이 번져갔다.

정부 당국의 미숙한 대처도 비난의 화살을 받아 마땅하다. 대통령 직속기구인 원자력안전위원회(원안위)는 '라돈 침대' 보도가 처음 나오자 대진침대 제품을 조사한 후 연간 외부피폭 방사선량이 기준치(1밀리시버트)에 못 미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원안위는 닷새 뒤인 지난 15일 대진침대 매트리스 7종의 연간 피폭선량이 기준치의 최대 9.3배(1.59~9.35밀리시버트)로 나타났다며 제품 수거 등 행정 조처에 나서겠다고 말을 바꿨다. 공신력이 있어야 할 정부 당국이 불과 며칠 사이 오락가락하니 소비자 불신과 불안감은 극에 달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정부의 대응이 한심스럽다.

업체의 안전불감증과 정부당국의 안전관리 능력 부족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불과 2년 전인 2016년 가습기 살균제에 함유된 독성 화학물질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으로 수 백명의 목숨을 앗아간 영국 옥시레킷벤키저의 후안무치(厚顔無恥)와 국내 보건당국의 무능한 대처는 당시 국민적 공분을 사기에 충분했다.

옥시 등 가습기 살균제 제조업체들은 PHMG가 폐를 딱딱하게 굳게 해 더 이상 숨을 쉬지 못하게 만드는 '폐섬유화 현상'과 다른 치명적 독성을 함유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옥시 등은 정부가 PHMG 성분이 있는 살균제를 판매하지 못하도록 명령을 내리기 전까지 뻔뻔스럽게 제품을 판매해왔다. 이는 사실상 간접 살인 행위나 마찬가지다.

당시 정부 당국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환경부는 지난 1996년 PHMG를 흡입하면 인체에 해로울 수 있다는 제조신고서를 받았다. 그러나 환경부는 이 물질에 대한 추가 독성자료를 요구하거나 이를 유독물질로 지정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환경부가 보여준 '깨진 유리창'에 옥시 등 관련업체가 전 국민을 상대로 '살균제 테러'를 자행한 셈이다.

영국 정치사상가 토머스 홉스는 국가권력이 반드시 갖춰야 할 요건으로 '국민을 보호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강조했다. 프랑스 철학자 장자크 루소도 '국민의 자연권을 보호하는 것이 국가의 가장 중요한 임무'라고 역설했지만 '라돈침대'나 '살균제 파문' 현장에는 이러한 철학이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개인 이익과 공공 이익이 서로 부딪힐 때 개인 이익만 고집하면 경제주체는 모두 파국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목초가 풍부한 초원에 통제할 수 없는 가축이 몰려오면 초원은 결국 방목할 수 없는 황무지로 전락하는 '공유지의 비극'(Tragedy of the commons)을 맞이한다. 양치기 소년들이 앞다퉈 양을 풀어놓으면 공유지는 황폐화하고 모두 불행해진다.

글로벌 시대를 맞아 기업이 왕성한 경영활동을 하는 데 지장을 주는 정부 규제는 과감히 없애는 것이 당연한 시대정신이다. 그러나 기업과 관련 당국이 안전불감증과 적당주의로 일관하는 공유지의 비극을 초래한다면 '보이지 않는 손'인 시장 메커니즘보다는 '보이는 손'인 정부 규제가 더 필요할 지도 모른다. 국민 생명과 직결되는 '꼭 필요한 규제'는 매우 엄격하게 해 시장 규율을 살리면서 국가를 안전하게 운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정부는 대진침대 외에 다른 회사 침대에 대한 실태 조사에 나서야 한다. 또한 방사성 물질이 원료로 들어간 모든 침대를 대상으로 리콜을 포함한 모든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방사성물질 성분표시제나 사전 안전기준 검사제 등 대책 마련도 시급하다. '안전한 대한민국'을 만들겠다고 공약해놓고 늑장대응과 뒷북행정으로 일관해온 정부로서는 시간이 넉넉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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