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김민구 기자] 마치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회전목마를 보는 듯하다. 정권이 바뀌었지만 대기업에 손을 벌리기는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전혀 없다. 대기업을 타도의 대상으로 여기면서 아쉬우면 제일 먼저 달려가 도와달라며 손을 벌린다.
준(準)조세 성격의 기부금 얘기다. 최근 산업통상자원부가 중소기업을 지원하기 위한 '산업혁신운동'을 펼치면서 대기업으로부터 2700억 원대 기부금을 거둬들여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다.
사연은 다음과 같다. 정부는 경영환경이 열악한 중소기업을 돕기 위해 생산 현장에 로봇을 배치해 자동화 공정을 갖춘 스마트 공장을 짓기로 했다. 정부는 이에 따른 기부금을 대기업으로부터 받았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상생협력 차원에서 추진된 산업혁신운동은 엄밀하게 말하면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3년 8월에 첫선을 보였다. 과거 정권의 적폐를 청산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여온 문재인 정부가 전임 정권의 정책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 따로 없다.
오죽하면 ‘헌법을 생각하는 변호사 모임’이 산업통상자원부 요구가 불법이라며 성명을 냈을까.
이뿐만이 아니다. 농림축산식품부는 ‘농어촌상생협력기금’ 모금이 지지부진하자 대기업으로부터 돈을 걷기로 했다. 2015년 한·중 자유무역협정(FTA) 비준 당시 농어민을 지원하기 위해 마련된 이 기금은 대기업·기부로 해마다 1000억 원씩 10년간 1조원을 걷을 예정이다. 정부 요구에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응할 수밖에 없는 게 대기업의 운명인 듯하다.
그리스 로마신화 '프로크루스테스(Procrustes)'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강도인 프로크루스테스는 지나가는 나그네를 집으로 데려와 쇠 침대에 눕히고 침대 길이보다 짧으면 다리를 잡아 늘리고 길면 잘라 버렸다. 악행을 거듭하던 그는 결국 아테네 영웅 테세우스에게 같은 방법으로 죽음을 당했다. '프로쿠스테스의 침대' 유래는 여기에서 비롯됐다. '프로쿠스테스의 침대'는 자신이 세운 기준에 다른 사람 생각을 억지로 맞추려는 아집과 편견을 일컫는다.
준조세(準組稅)는 프로쿠스테스의 침대다. 삼성 등 국내 대기업을 ‘최순실 사태’의 올가미에 빠뜨린 것도 준조세다. 준조세는 엄밀하게 말하면 법에도 없는 세금이다. 기업이 부담하는 각종 기부금과 성금이 준조세 성격을 띠다 보니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식이 될 수밖에 없다.
지난 2016년 한 해만 해도 기업들이 정권의 눈치를 보며 지갑에서 꺼낸 준조세가 20조 원을 넘어섰다. 다른 나라에는 거의 없는 준조세 부담이 이 정도라면 우리는 가히 ‘준조세 공화국’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이러다 보니 국내 기업이 '동네북' 신세를 면하기 어려운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또한 기업과 정부 관계가 '죄수의 딜레마'로 점철될 수밖에 없다. 정부가 기업에 대한 각종 인허가, 세무조사, 공정거래위원회 조사 등 서슬 퍼런 칼자루를 휘두르는 데 이에 맞서 싸울 기업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인 1988년 5공(共) 비리 청문회에 모습을 드러낸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시류(時流)에 따라 편히 살려고 돈을 냈다" "기업이 권력 앞에서 왜 만용을 부리겠느냐"라고 술회한 대목은 권력 앞에 선 대기업의 초라함을 보여주기에 충분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특히 한국 기업인들에게 배임죄 못지않게 두려운 죄목이 이른바 '괘씸죄'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과거 유신시절까지 돌아갈 필요도 없다.
국제그룹 양정모 회장은 당시 정권에 돈을 적게 냈다가 괘씸죄로 1985년 그룹이 공중분해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런 분위기라면 기업총수로서는 정부에 찍히지 않기 위해 성금, 기부금 등 ‘보험’부터 들어야 하는 게 당연한 일이 아닐까.
한국 경제는 약 30년 사이 20배 가까이 급성장해 세계경제에서 좀처럼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우등생'으로 우뚝 섰다. 한국경제가 이처럼 짧은 시간에 눈부시게 발전할 수 있었던 데에는 잘 살아보자는 온 국민의 열정 못지않게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SK 등 글로벌 기업이 전 세계 무대에서 흘린 땀의 결실이다.
세계경제 지평이 급변하고 있지만 국내 기업에 각종 명목으로 은근슬쩍 손을 내미는 '수금(收金)통치'의 후진적 관행은 전혀 달라진 게 없다. 이처럼 기업에 끊임없이 손을 내밀면서 다른 한편으로 기업에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으라고 압박하는 것은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다.
최순실 사태를 계기로 사라진 듯한 정부의 고질적인 수금통치가 관(棺)을 열고 되살아나는 듯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될 것이다. 정부는 물론 여야 할 것 없이 정치권이 기업인들에게 손을 내미는 행태를 없애기 위해 현재 국회 서랍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 '준조세금지법'을 하루 속히 통과시켜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도 지난 대선 당시 "준조세 금지법을 만들어 기업을 권력의 횡포에서 벗어나게 하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는가. 기업 경영환경이 법인세 인상, 근로시간 단축, 최저임금 인상 등으로 가뜩이나 어려운 가운데 경제를 살리겠다며 뒤로는 준조세를 강요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정부가 중소기업을 도울 생각이라면 정부 예산을 투입해 추진하면 될 일이다. 그것이 훨씬 떳떳한 선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