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코트로 넘어간 ‘한반도 평화’...北 개혁-개방 이끌 ‘트로이목마’ 시급
[더팩트ㅣ김민구 기자] 1989년 11월 9일 밤이었다. 동독 사회주의통일당 소속 정치국원 귄터 샤보프스키는 발표 내용을 정확히 모른 채 동독 주민의 서독 여행 허용을 선언했다. 이에 독일어가 짧은 이탈리아 기자가 “그럼 언제부터 시행하냐”는 질문을 했고 샤보프스키는 얼떨결에 “지금 당장”이라고 답했다.
TV로 이를 지켜본 동독인 수천 명은 베를린장벽으로 몰려들었다. 이들은 장벽 통과 장소인 보른홀머 국경검문소에서 국경수비대 요원들에게 문을 열라고 함성을 질렀다. 상부 지시가 없어 머뭇거리던 병사들은 엄청난 인파에 놀라 결국 통로를 열었다.
1961년 이후 28년을 버텨온 ‘냉전의 철옹성’ 베를린장벽은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졌다. 독일분단 종식과 통일 여정의 급행열차를 이끈 세기적 사건이 밤도둑처럼 찾아온 것이다.
독일 통일이 동독 당(黨) 대변인의 말실수와 이탈리아 기자의 오보로 앞당겨졌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법도 하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독일 통일 드라마’의 총감독은 빌리 브란트 전(前)서독 총리였다. 그는 미국과 소련의 첨예한 냉전구도에도 동독과 화해협력을 추진하는 ‘동방정책’을 펼쳤다.
브란트 전 총리는 베를린장벽이 붕괴된 다음 날 “서독과 동독이 함께 가진 것을 가꾸어 나가자”고 선언하며 위대한 게르만 민족을 통합하는 꿈을 펼쳐나갔다. 서독은 브란트 이후 정권이 바뀌어도 동독과의 화해 채널을 유지하는 등 민족 동질성 회복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국제정치학적 측면에서 보면 브란트는 ‘트로이 목마’ 전략의 달인이다. 트로이와 10여년간 전쟁을 벌여온 그리스는 군인 30여명을 매복시킨 거대한 목마를 만들어 트로이로 보내 결국 트로이를 무너뜨렸다. 브란트는 철옹성을 사이에 두고도 교류와 협력이라는 트로이 목마로 동독을 굴복시킨 ‘백마를 타고 온 초인’인 셈이다.
지난달 27일 전 세계는 한반도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군사분계선(MDL) 상징인 높이 5㎝, 폭 50㎝ 콘크리트 연석을 걸어 넘습니다. 분단의 턱을 넘는 데 무려 65년의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이렇게 쉽게 넘을 수 있는데 말입니다.”
판문점 남측 평화의 집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발언이다. 불과 얼마 전 전운이 감돌던 한반도가 남북 정상의 역사적 회동으로 ‘평화의 봄’을 만끽하고 있다.
역사를 살펴보면 도저히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이 일어나 세계사를 뒤흔든 예는 얼마든지 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블랙 스완(Black Swan)'이 이제 한반도를 엄습하고 있는 것이다. 유럽인들은 1697년 호주 대륙에서 검은색 백조를 처음 발견하기까지는 모든 백조는 흰색이라고 인식했다. 그때까지 인류에게 발견된 백조는 모두 흰색이었기 때문이다. 이때의 발견으로 '존재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나 불가능하다고 인식된 상황이 실제 발생하는 것'을 가리켜 '블랙스완'이라 부른다.
일어날 것 같지 않았던 남북한 정상의 만남은 한반도를 둘러싼 ‘정보의 비대칭성(Information asymmetry)’을 해소하는 시금석이 됐다. 정보의 비대칭성은 양측이 갖고 있는 정보에 차이가 있을 때 일어난다. 정보의 비대칭성이 발생하면 비효율이 생기게 마련이다. 이에 따른 결과물이 역선택(adverse selection)이다. 역선택은 정보 불균형으로 자신에게 불리한 의사결정을 내리는 것을 뜻한다.
올해 남북 분단 65주년을 맞는 한반도는 정보의 비대칭성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핵무기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개발에 매달려온 북한은 그동안 미국을 상대로 미사일 위협을 일삼았다. 이에 질세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는 ‘화염과 분노’, ‘군사행동 장전완료’ 등 섬뜩한 표현을 쏟아내며 선제 타격을 비롯한 모든 선택지를 갖고 있다고 엄포를 놓았다.
북한과 미국은 같은 궤도에서 서로를 향해 돌진하는 열차와 같은 치킨게임을 벌여왔다. 이런 상황에서 남북한 정상이 한 자리에 모여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서로 속내를 털어놓고 기탄없이 얘기를 나눈 것은 현명한 결정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전술학적 관점에서 보면 핵무기는 전쟁 억지력(war deterrence) 효과가 있다. 핵무기는 ‘사용하는’ 무기가 아닌 전쟁을 억지하는 도구라는 얘기다. 쉽게 설명하면 핵무기를 갖고 있는 나라는 핵으로 다른 나라를 공격해서도, 또한 다른 나라로부터 공격을 받아서도 안 된다는 얘기다.
그런데 그동안 미국과 북한이 서로에게 던진 격한 어투는 냉철한 이성으로 판단하기에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 한 두 개가 아니다. 수천 개에 달하는 핵무기를 갖고 있는 미국은 사회주의 국가이며 경쟁국인 중국과 러시아가 핵무기 수천 개를 갖는 것에 대해 왜 생존의 위협을 느끼지 못했을까.
2001년 9·11테러로 전쟁 명분을 얻은 부시는 2002년 2월 국정연설에서 이라크와 이란, 그리고 북한을 ‘악의 축’으로 지목했다. 사실상 북한을 전쟁 대상으로 지목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더욱이 미국이 2003년 3월 20일 이라크를 침공한 장면을 두 눈으로 지켜본 북한이 미국 압박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로 핵무기를 고집한 점을 궤변으로만 치부하기에는 논리상 아쉬움이 남는다.
남북한과 미국이 정보의 비대칭성 함정에 빠진 가운데 미국의 잇따른 ‘선제 타격론’과 북한의 ‘전쟁 불사론’ 맞대응은 한반도를 벼랑 끝으로 떠미는 꼴이었다. 만일 한반도에서 또다시 전면전이 발생하면 수 천만명에 달하는 국민이 희생되는 우리 민족의 대참사가 될 것이다. 또한 ‘한강의 기적’이라는 세계적 찬사를 들으며 일궈낸 대한민국의 눈부신 경제발전은 전쟁으로 한 줌의 잿더미가 된다.
이와 함께 북한 핵시설 파괴에 따른 대규모 방사능 유출로 한반도는 사람이 살 수 없는 불모지로 전락한다. 5000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한(韓)민족이 공멸해 세계사에서 사라질 지도 모르는 중차대한 상황이다.
“한반도에서 전쟁은 절대 안된다”는 문재인 대통령 선언에도 불구하고 미국 언론과 정부가 그동안 전쟁 가능성을 조금씩 흘린 것은 자주국가인 한국 의사를 무시하고 한국민을 볼모로 삼기에 충분하다. 이는 동맹국인 한국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이런 가운데 남북한이 이번 정상회담에서 종전을 선언해 한반도에 평화를 가져온 것은 크게 박수칠 만하다. 양측은 이제 자존심을 내세우기보다는 구동존이(求同存異)의 자세로 남북한 상호존중과 소통을 강조해야 한다.
‘판문점 선언’으로 공은 이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코트로 넘어갔다. 트럼프 대통령은 5월 중에 열릴 예정인 김정은 위원장과의 회담에서 비핵화 실현을 위한 구체적인 ‘행동계획’을 만들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됐다.
트럼프 대통령이 쉽지 않은 상대인 북한을 대상으로 세계사적 결과물을 내놓기 위해서는 정보의 비대칭성 해소가 시급하다. 북한의 비핵화가 최우선 과제이기는 하지만 북한이 미국을 믿고 불신(不信)의 담장을 스스로 허물 수 있는 가시적 조치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이를 위해 미국이 북한을 ‘악의 축’에서 제외하고 북한과의 수교를 본격 추진하는 것을 고민해야 한다.
또한 미국이 북한 체제를 보장한다는 또 다른 조치로 북한에 연락사무소를 , 미국에 북한 연락사무소를 설치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연락사무소를 통해 정보의 비대칭성을 해소하고 북미수교의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감한 조치를 통해 폐쇄된 북한 체제를 개방의 길로 인도하고 자유화 바람을 불어 넣어야 한다. 이를 통해 북한이 국제사회 일원으로 책임있는 자세를 보일 수 있는 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문 대통령이 한반도를 뒤덮은 ‘블랙스완 태풍’에 맞서 ‘트럼프판(版) 트로이목마’를 서둘러 마련해야 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