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김민구 기자] 요즘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있다. 졸린 눈을 비비며 스마트폰으로 오늘의 날씨를 확인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날씨를 챙길 만큼 특별한 일정이 있는 것은 아니다. 미세먼지주의보가 뜨면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접어 넣은 마스크를 꺼내기 위해서다.
미세먼지가 우리 일상을 시나브로 파고들어 거리에서 마스크를 쓰는 시민들 모습은 어느새 낯익은 풍경이 됐다. 우리 삶의 공간이 숨이 턱턱 막히는 뿌연 미세먼지로 뒤덮이면서 맑은 공기를 마시는 일은 어느덧 사치가 된 것이다. 상쾌한 공기를 마음껏 마실 수 있는 기본 욕구를 충족할 수 없는 현실에 안타까움을 넘어 분노마저 치밀어 오른다.
한국의 대기오염은 가히 세계적 수준이다. 오죽했으면 한국이 미세먼지 문제를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 2060년 세계에서 대기오염에 따른 조기 사망률이 가장 높은 나라가 될 것이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보고서가 나왔겠는가. 선진국 반열에 들어섰다고 자부하는 우리로서는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잠시 타임머신을 타고 1833년으로 돌아가 보자. 영국의 한 마을에 목초가 풍부해 가축 기르기에 적격인 초원이 있었다. 초원 인근에 살고 있는 목동들은 가축을 끌고 와 풀을 먹였다. 땅은 넓고 가축 수가 적어 가축이 풀을 마음껏 뜯어먹어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초원에 점점 더 많은 가축이 몰려오면서 상황은 돌변했다. 좋은 풀은 줄어들고 대지는 오물로 가득 찼다. 초원은 결국 방목할 수 없는 황무지로 전락했다.
영국 경제학자 윌리엄 포스터 로이드가 1833년에 발표한 ‘공유지의 비극’(Tragedy of the commons)이다. 미국 캘리포니아대 산타바바라 소속 생물학자 가렛 하딘이 1968년 과학잡지 ‘사이언스’에 게재하면서 세간의 이목을 모은 이 이론은 개인 이익과 공공 이익이 서로 부딪칠 때 개인 이익만 고집하면 경제주체가 파국을 맞는다는 교훈을 일깨운다.
환경오염은 ‘공유지의 비극’의 대표적인 사례다. 영국 초원뿐만 아니라 물, 공기, 토양 등 주인이 없는 ‘자유재’는 쉽게 황폐화된다. 공장에서 내보내는 폐수로 인근 하천이 썩어가고 공중화장실이나 국립공원이 지저분해지고 쓰레기가 쌓이게 되지 않겠는가. 이처럼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은 마음대로 사용해도 된다는 낙후된 시민의식 탓도 있지만 근본적 이유는 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숨 막히게 하는 미세먼지도 같은 맥락에서 살펴봐야 한다. 공장, 화력발전소, 자동차 등이 ‘침묵의 살인자’ 미세먼지를 연일 뿜어내고 있지만 어느 누구도 자신의 탓이라고 선뜻 손을 들지 않는다. 책임을 모면하기 위한 ‘폭탄 돌리기’만 하고 있는 셈이다.
환경부 등 관련부처는 미세먼지 주범이 중국이라며 대책 마련에 손을 놓다시피 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실상을 살펴보면 모든 비난의 화살을 중국에만 돌릴 수는 없는 일이다. 국내 공장과 보일러나 발전소 등 제조업 부문에서 배출되는 미세먼지가 전체의 52~65% 가량이라는 환경부 자료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지 않는가. ‘봄철 불청객’을 넘어 ‘국가적 재앙’이 된 미세먼지를 더 이상 중국 탓만 하지 말라는 얘기다.
정부의 에너지전환정책도 한심하기 짝이 없다. 석탄화력발전소가 미세먼지 주범이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친환경 에너지인 원자력발전이 정부의 탈(脫)원전 정책에 밀려 벼랑 끝에 서있다.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다.
경제학 관점에서 볼 때 미세먼지는 ‘외부효과(Externality)’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미세먼지는 경제와 사회에 나쁜 영향을 주는 ‘부정적 외부효과(external diseconomies)’다. 외부효과는 또한 시장실패(Market Failure)의 대표적 사례이기도 하다.
이럴 경우 정부 개입이 정당화될 수밖에 없다. 정부가 나서야 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정부가 오래된 차량 운행을 금지하는 등 명령과 통제로 직접 규제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세금이나 보조금으로 모든 국민이 자율적으로 환경보호에 나서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정부가 미세먼지에 대한 대책으로 국민들에게 마스크를 쓰라고 강조 하지 말고 미세먼지를 줄일 수 있는 특단의 대책을 내놔야 한다는 얘기다. 국민 생존을 위협하는 상황에서 ‘보이지 않는 손’인 시장 메커니즘 보다는 엄격한 규제를 강화하는 ‘보이는 손’이 더 절실하기 때문이다.
영국 정치사상가 토머스 홉스는 국가권력이 반드시 갖춰야 할 요건으로 ‘국민을 보호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강조했다. 프랑스 철학자 장자크 루소도 ‘국민의 자연권을 보호하는 것이 국가의 가장 중요한 임무’라고 역설했지만 현 정부 환경정책에서는 이러한 철학을 읽을 수 없다.
정부는 실천·지속 가능한 종합처방으로 미세먼지에 ‘빼앗긴 봄’을 되찾아야 한다. 공장 등 제조업 부문의 화석 에너지원 의존도를 대폭 낮추고 원전 등 친환경에너지를 대폭 확대하는 등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의 전환이 절실하다. 또한 미세먼지를 줄이기 위해 중국정부와 치밀한 협력방안을 도출해야 할 것이다.
미세먼지를 해결할 시간이 넉넉하지 않다. 갈수록 맹위를 떨치는 미세먼지에 마스크가 아닌 방독면을 매일 쓰고 살아갈 수는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