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생활용품 대명사, 가습기 살균제 사태로 추락…대형 유통 체인서 사실상 '퇴출'
[더팩트ㅣ중계동=안옥희 기자] "이제 생활용품을 못 믿겠습니다."
한 대형마트 세제 판매대에서 만난 소비자 김 모 씨의 말이다. 주부인 김 씨는 오랜 시간 매대 앞에 머물며 제품 용기 뒷면을 꼼꼼하게 확인하고 있었다. 그는 "가습기 살균제 사망사고로 '케미포비아(화학물질 공포증)'가 생긴 것 같다"며 "업체가 표기한 제품 설명은 믿을 수 없다. 직접 제품 성분명을 인터넷에 검색해봐야 안심이 된다"고 말했다.
가습기 살균제 사태 이후 옥시레킷벤키저(현 RB코리아)에 대한 소비자 여론이 최악으로 치달으면서 현재 주요 유통채널에서 옥시 전 제품이 자취를 감췄다. 제품은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소비자 불신은 여전했다. 지난 22일과 23일 <더팩트>가 서울 노원구에 있는 롯데마트‧홈플러스 중계점, 이마트 창동점 등 대형마트 3곳과 H&B스토어, 편의점 등 주요 유통채널에서 만난 소비자 20여명은 "다른 옥시 제품도 믿을 수 없어 불매 중"이라고 입을 모았다. 현재 대형마트들은 옥시 전 제품을 매대에서 치우고 취급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그 많던 옥시 제품은 어디로 갔을까.
한 대형마트 관계자는 "옥시 브랜드 자체에 대한 소비자 인식이 안 좋은 데다 불매운동 여파로 대형마트들은 아예 취급을 안 하고 있다"며 "그러나 작은 슈퍼마켓에선 아직 재고를 판매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실제 이날 주택가에 있는 한 소규모 상점의 매대 구석에서 판매 중인 옥시 제품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옥시는 지난해 9월 국내 유일한 직영 생산공장 익산공장을 폐쇄한 이후 모든 제품 생산을 중단했다. 앞서 그해 5월에는 섬유유연제 브랜드 '쉐리'와 세탁세제 브랜드 '파워크린' 등 일부 제품을 단종한 바 있다. 단종 제품을 제외한 나머지는 슈퍼마켓과 온라인 쇼핑몰에서 판매 중이다. 해당 제품들은 익산공장이 문을 닫기 직전까지 생산했던 것이다. 남아 있는 제품의 제조 일자를 확인해보니 공장이 문을 닫기 전인 2016년~2017년 4월까지 생산된 것이 대부분이었다.
점포 주인은 "옥시크린이 표백제 중에서 제일 잘 팔렸는데 가습기 살균제 사태 이후 아무도 사가지 않는다"며 "(대리점이)가습기 살균제 빼고 다른 제품은 괜찮다고 해서 한참 전에 들여놨는데 제대로 안 팔려 먼지만 쌓이고 있다"고 푸념했다.
최근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화장품에서 기준치를 초과한 중금속이 나오고 섬유탈취제에서 가습기 살균제 성분이 검출되는 등 화장품, 생활 화학제품 속 유해성분 문제가 다시 사회문제로 대두하면서 이들 제품에 대한 소비자 불신과 불안감이 확산하는 분위기다.
생활 화학제품 성분 논란의 시초에는 옥시가 있다. 옥시크린, 쉐리, 물 먹는 하마, 데톨 등 옥시 제품은 한때 생활용품의 대명사로 불렸다. 그러나 가습기 살균제 사망 사고가 세상에 알려지고 난 뒤 여론이 급속도로 악화했고 거국적인 불매운동이 벌어졌다. 대대적인 불매운동이 진행된 2016년부터 옥시 전 제품의 시장점유율이 크게 떨어지면서 진열해도 팔리지 않아 대형마트 3사를 비롯한 주요 유통채널에서 모두 빠졌다.
가습기 살균제 사태 이후 대형마트들은 제품 안전성 검증 절차를 강화하고 있다. 대형마트 관계자는 "가습기 살균제 사태 이후 살충제 달걀 파동 등 식품까지 위해성 논란이 불거지면서 안전성에 대한 고객 눈높이가 높아지고 있다. 고객 눈높이에 맞춰 제품 관리, 검증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형마트에선 '옥시'라는 이름을 언급하는 것조차 금기시하고 있었다. 롯데마트 세제·생활용품 판매대에서 옥시크린을 찾자 판매 직원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옥시 제품은 그때(불매운동) 이후로 매대에서 다 뺐다"며 타 업체의 유사한 제품을 보여주며 '옥시크린 대체품'이라고 설명했다.
홈플러스와 이마트 직원들도 옥시 제품 이야기 자체를 꺼리는 모습이었다. 제습제 '물 먹는 하마', 손 세정제 '데톨 핸드워시' 등 옥시 제품 판매 여부를 묻는 취재진에게 직원들은 하나같이 "옥시는 공장이 문을 닫아 제품이 이제 안 나온다"며 타 업체에서 나온 유사한 '대체품'을 추천했다. 한 직원은 "옥시 관련 이야기하기가 조심스럽다"며 "아직도 나이 많은 분들은 옥시 제품을 찾는다. 옥시가 유명했던 건 사실이지만 지금은 대체 가능한 제품이 많이 나와 타사 제품을 소개한다"고 말했다.
한때 옥시 제품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대형마트 세제‧생활용품 판매대에는 LG생활건강, 애경산업, CJ라이온, 유한양행 등 경쟁사 제품으로 채워져 있었다. 옥시와 비슷한 상품군을 갖춘 이들 업체는 옥시 불매운동 당시 반사이익을 톡톡히 누리면서 점유율을 끌어올렸다.
대형마트뿐 아니라 헬스 앤 뷰티(H&B) 스토어에서 팔리던 옥시 브랜드 '비트(제모 크림)', '숄(각질 제거기)' 등도 모습을 감췄다. 올리브영 매장 직원에게 옥시 제품 판매 여부를 묻자 "현재 모든 옥시 제품을 취급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옥시는 1996년 출시한 가습기 살균제를 리뉴얼해 2001년부터 폴리헥사메틸렌구아디닌(PHMG) 인산염 성분이 든 살균제 '옥시싹싹 뉴가습기 당번'을 판매해왔다. 옥시는 제품에 들어간 독성 화학물질 PHMG의 안전성을 검증하지 않아 73명이 사망하는 등 피해자를 가장 많이 낸 기업이다. 이에 따라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강력한 불매운동이 장기간 이어지면서 문제의 제품뿐 아니라 전체 제품이 사실상 시장에서 퇴출당했다. 가습기 살균제 원료를 제조한 업체는 SK케미칼(현 SK디스커버리)이다. SK케미칼은 현재 공식 사과나 보상 절차에 나서지 않고 있다.
옥시는 소비자 불매로 시장 점유율이 급격히 추락하면서 국내 사업 철수설이 돌기도 했다. 국내 매출이 90% 급감하고 임직원도 70% 감원했기 때문이다. 옥시는 지난해 5월 '옥시크린 스프레이', '냄새먹는 하마' 등 호흡기 관련 제품을 포함한 일부 상품의 생산을 중단하며 국내 제품 포트폴리오를 재정비하고 있다. 이어 9월에는 전북 익산2공단에 있는 직영 생산공장을 폐쇄했다. 불매로 매출이 거의 발생하지 않아 생산 의미가 없다는 판단에서다. 폐쇄된 익산공장은 지난해 10월 경쟁사이자 옥시 불매의 가장 큰 반사수혜를 누린 기업인 LG생활건강의 자회사 해태htb에 매각됐다.
옥시는 정부의 가습기 살균제 1, 2차 피해자 조사에서 1, 2단계 판정을 받은 피해자에게는 대부분 피해 배상 지급을 완료했다. 현재 3차의 1, 2단계 피해자들을 위한 배상을 진행하고 있다. 옥시 측은 국내 사업 철수설에 대해 선을 그었다.
옥시 관계자는 "가습기 살균제 제품만 문제가 있었던 것인데 다른 제품까지 팔리지 않아 현재 매출이 거의 없는 상황"이라며 "철수 계획은 없고 책임 있는 기업으로 한국 사회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피해자 배상에 전사 노력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