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인사동=안옥희 기자] 국내 주요 여행사들의 초저가 패키지여행 상품 경쟁이 과열 양상을 띠고 있는 가운데 태국·베트남 등 동남아에서 활동하는 해외가이드들이 생활고에 내몰리는 등 피해를 보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태국 현지에서 한인가이드로 일했던 박인규 한국노총 한국통역가이드연합본부장은 지난 16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 위치한 국내 여행업계 1위 하나투어 본사 앞에서 가이드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1인 시위를 벌였다. 그는 국내 여행사들이 '갑'의 위치에서 랜드사(현지 여행사)를 쪼아 '을'의 처지인 가이드들에게 사실상 '메꾸기' 등을 강요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국내 대형 여행사들은 박 본부장의 주장에 대해 전면 부인하고 있어 양측 입장이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 가이드·여행사 간 '메꾸기 갑질' 진실 공방
박 본부장에 따르면 여행사들은 26만9000원 짜리 저가 태국 패키지여행 상품 금액에 요트, 전통안마, 코끼리 트레킹, 야간 시티 투어까지 현지 관광이 전부 포함돼 있다고 광고하지만, 실제로는 현지 비용이 미포함된 경우가 많다. 문제는 여행상품 구조상 이 같은 현지 비용을 랜드사와 해외가이드들이 떠안게 된다는 점이다.
업계에서는 가이드들이 손님의 부족한 현지 비용을 대신 채우는 것을 ‘메꾸기’라 부른다. 가이드들은 여행사들의 '메꾸기' 금액 때문에 손님을 받을수록 적자를 보게 된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반면, 하나투어측은 '메꾸기 갑질'을 했다는 의혹에 대해 반박했다. 보통 여행 상품 가격만 놓고 봤을 때 하나투어가 제일 비싼 만큼 다른 업체보다 현지 비용을 가장 많이 지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투어 관계자는 "랜드사들이 저희에게 '이 상품은 얼마에 진행하겠다'는 식으로 요금을 내놓으면 저희가 거기에 맞춰 비용을 지불한다. 랜드사에서 가이드에게 행사비를 주고 행사를 시키는 것이다"며 "문제 제기한 가이드는 현재 하나투어 소속도 아니다. 여행사-랜드사-가이드 구조에서 저희가 가이드와 직접적으로 관계할 일은 별로 없다"고 반박했다.
◆ 가이드 "기형적 구조에 피해 막심" VS 여행사 "강요한 적 없어…억울하다"
양측의 입장은 '패키지 여행'에 포함돼 있는 '쇼핑 옵션'을 두고도 팽팽하게 갈렸다.
한국통역가이드연합본부는 상품비용의 대부분은 국내 여행사가 챙기지만, 부족한 현지 비용은 랜드사와 해외가이드가 충당하는 왜곡된 상품 구조 때문에 가이드들이 서비스보다 쇼핑과 옵션 권유에 열을 올릴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여행사들이 최저가여행으로 손님을 모으고 해외가이드들에겐 지원금 등을 주지 않아 가이드들이 손님들에게 상품을 강매하며 수익을 뽑아내야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는 주장이다. 아울러 지금 같은 착취 구조를 개선하기 위해선 여행사들이 지원금을 늘리고 저가 패키지여행 상품 가격을 현실화해야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모두투어는 자사 정책과 다른 부분이 많은데 이번 이슈에 거론되는 것 자체가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모두투어 관계자는 "여행사들의 '메꾸기 갑질' 주장은 자사 정책과 다른 부분이 많아 정확하게 어떻게 피해를 보고 있는지 납득하기 어렵다"며 "'메꾸기'로 인해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다고 주장하는데 상품 행사를 강요한 적도 없다"고 말했다. 이어 "그분들 수익을 보장하기 위해 여행사가 가격을 올리는 것은 시장 순리와도 맞지 않다"면서 "우리는 손님들에게 좋은 서비스, 좋은 가격에 공급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다"고 덧붙였다.
◆ '을'이기 때문에…적자보면서도 저가 패키지상품 거부 못해
그렇다면 랜드사와 가이드들이 적자를 보면서도 대형여행사들의 저가 패키지여행상품을 거부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박 본부장은 여행사들과 현지에 있는 랜드사가 '갑을관계'라고 지적하며, '을'인 랜드사·가이드들이 어떻게든 손님을 받아야 하는 입장이다 보니 '갑'인 여행사로부터 '갑질'을 당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여행사들이 '그 (저가)상품 안 받으면 시즌(성수기) 때 좋은 팀(단체관광객)을 안 준다'고 하기 때문에 돈을 벌기위해서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랜드사들이 울며 겨자먹기로 상품을 진행하는 것이다"고 설명했다.
익명을 요구한 또 다른 여행가이드 역시 "가이드들은 한 군데 소속으로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여행사 상품을 다 진행하고 있기 때문에 부당한 행위 등 문제 제기를 하기가 상당히 어렵다"며 "사실상 일용직 근로자나 프리랜서 입장이기 때문에 여행사 눈 밖에 나면 활동하기가 곤란해지기 때문이다"고 토로했다.
◆ 여행사 '갑질' 비판하며 노조까지 설립…상생방안 기대
최근 몇 년 간 여행객들이 쇼핑 등 옵션관광을 줄이거나 거부하는 추세에 따라 쇼핑과 옵션이 없는 상품이 증가하면서 랜드사들의 수익구조가 위축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 가운데 원가에도 못 미치는 지상비로 인해 랜드사 뿐만 아니라 해외가이드들의 피해도 날로 커지고 있다. 지난 7월에는 베트남에서 활동하던 한인 가이드가 패키지상품 문제 등으로 인한 생활고를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도 있었다.
이 같은 열악한 상황에 따라 박 본부장 등 일부 해외가이드들은 최근 노조를 결성한 뒤 한국통역가이드연합본부를 설립하고 국내 여행사들에 지상비 지급, 메꾸기 금액 축소 등을 요구하고 있다. 이들은 업계 1·2위인 하나투어·모두투어를 중심으로 여행사들의 각종 부당한 행위에 대한 개선요구를 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여행사들로부터 고정급+인센티브가 지급되면 가장 좋지만, 사실 가이드들은 여행사들과 계약관계에 있지 않으므로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일정 기간 전속계약 등 상생방안이 마련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