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박을 좇아 경마와 경륜, 복권과 카지노, 소싸움 등 사행산업의 문을 두드렸지만 쪽박만 찬 이들이 늘고 있다. '합법적인 도박'인 사행산업의 총매출은 지난해 20조 원을 넘어섰다. 여기에 불법도박 규모는 줄잡아 100조 원에 이른다. 가히 '대한민국은 도박 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중 경마는 일명 '화상경마'로 불리는 장외발매소를 앞세워 학교 앞까지 침투하며 우리 생활 깊숙한 곳에 싹을 틔우고 있다. <더팩트>는 지역주민과 마찰을 빚고 있는 장외발매소의 문제점과 실태, 그리고 국내 도박 산업의 부작용 등을 모두 6회에 걸쳐 짚어본다. [편집자 주]
[더팩트ㅣ용산=박대웅·이성락 기자] 고등학교 2학년 딸을 둔 정방(46·여) 씨는 지난 2013년 4월이 쉽게 잊히지 않는다. 당시 딸이 다니던 중학교 근처에 화상경마장이 들어설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가슴 먹먹했던 그 날을.
소문은 현실이 됐다. 이후 정 씨의 삶은 180도 바뀌었다. 하루의 절반을 천막농성장에서 지내게 됐으며, 평범한 엄마에서 용산화상경마장 반대를 주장하는 '용산화상경마도박장 추방대책위원회'(대책위)의 공동 대표가 됐다. 선거 날짜도 모르고 지나치던 그가 본격적으로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된 시기도 그 무렵이다.
"처음엔 동네에 그저 예쁜 건물이 생긴다고 해서 좋아했어요. 그게 경마장 건물일 줄 상상도 못 했죠. 딸을 키우는 입장에서 가만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학부모들과 교사들이 반대 운동에 나서게 된 거예요. 우리의 주거환경을 지켜야겠다는 마음뿐이었어요."
경마를 중계하고 마권을 발매하는 용산화상경마장은 서울 한강로3가에 자리 잡고 있다. 주민들이 입점 반대 운동을 벌이는 이유는 이 건물 반경 500미터(m) 안에 유치원과 초·중·고등학교 등 6개의 교육시설이 있기 때문이다. 현재 정 씨의 딸은 용산화상경마장에서 235m 떨어져 있는 성심여자고등학교에 재학하고 있다.
그간 정 씨를 비롯한 주민들은 '교육권 및 주거권 침해'를 우려했다. 용산화상경마장을 운영하는 한국마사회는 법적 조항을 앞세워 경마장 건립에 문제없다고 맞섰다. 용산화상경마장은 학교로부터 200m 이내, 학교환경위생정화구역 내 유해시설의 설립을 금지하는 학교보건법에 어긋나지 않는다.
"이렇게 큰 도박장과 오락실에 같은 기준을 적용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는 거죠. 경마장이 들어서면 노숙자와 만취자가 증가하고, 도박 빚을 유도하는 각종 사채광고 전단이 뿌려집니다. 유흥업소가 늘어날 것이라는 건 불 보듯 뻔하고요. 경마장은 분명 청소년 유해시설입니다. 이렇게 큰 도박장이 등하굣길에 있다니 참…."
주민들이 용산화상경마장 바로 옆에 천막을 친 건 2014년 1월이다.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마사회가 개장 의사를 밝히자 "도박장 완전 폐쇄"를 주장하며 배수진을 친 셈이다. 주민들은 그해 6월 28일 기습 개장을 시도하는 마사회와 충돌했고, 김율옥 성심여중·고 교장, 성백영 성심여고 교감, 김경실 용산구의원 등 지역주민 22명이 '업무방해 및 집시법 위반' 등의 혐의로 고발당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용산화상경마장은 지난해 5월 31일 개장에 성공했다. 그러나 마사회의 '기습 개장'에 주민들의 반발 수위는 한층 높아졌고, 시위의 규모는 더욱 커졌다. 성심여고 학부모인 마영해(57·여) 씨는 그즈음 반대 농성에 합류했다.
"학생들의 교육권을 지키는 데 동참하기로 했죠. 영등포 경마장을 피해 이사를 왔는데, 용산화상경마장이 생겨버리니 정말 황당했습니다. 화상경마장이 도심 안에 생겨나는 것을 막는 일은 우리 모두가 해야 할 일입니다."
마사회가 주민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화상경마장 '도심 영업'을 강행하는 이유는 화상경마장이 차지하는 매출의 규모가 크기 때문이다. 사행산업통합감독위원회에 따르면 전국 30개인 화상경마장에서 한 해 동안 벌어들이는 돈은 5조 원에 이른다. 이는 지난해 경마 산업 전체 매출액(7조7322억 원)의 68.6%에 해당한다.
용산화상경마장 시설은 지상 18층, 지하 7층으로 전국 최대 규모다. 주민들의 반발 수위가 높은 이유 중 하나로 경마장 시설의 규모가 크다는 것도 포함돼 있다. 일단 화상경마장은 13층부터 17층까지, 5개 층만 꾸려졌다. 지정좌석제로 운영되는 이곳은 각자의 자리에서 편하게 대형 모니터를 통해 경기를 관람하는 방식이다. 주 고객은 40~50대 중년의 남성들이다.
마사회는 갈등을 완화하는 차원에서 1~7층을 주민들을 위한 '청소년 놀이시설 등 복합문화공간'으로 조정한다는 계획을 밝혔다. 그러나 마사회의 이런 결정은 갈등의 불씨를 지피는 결과를 낳았다. 주민들은 화상경마장 건물 안에 '키즈카페'가 들어선다는 소식에 즉각 반발, "아이들을 앞세워 도박장을 활성화시키려는 것이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주민들은 현재까지 천막농성과 피켓시위를 이어오고 있다. 뜨거웠던 여론의 관심이 다소 식었지만,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어른이 되겠다"는 일념으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2016년 6월 26일, 천막에는 '도박장반대운동 1152일, 천막노숙농성 887일'이라는 푯말이 붙었다(8일 현재 반대운동 1164일, 노숙농성 899일). 그리고 이날 주민 30여 명은 '용산화상경마장 입점 반대'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용산화상경마장 건물 입구를 또 한 번 막아섰다.
"겨울엔 마실 물이 꽁꽁 얼고, 여름엔 땀이 비 오듯 흘러요. 경마장을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욕을 듣기도 했죠. 그러나 시위를 시작한 걸 후회하지 않습니다. 주민들이 이렇게 반대 시위라도 하지 않으면 화상경마장이 있는 동네는 학생들이 마음 놓고 공부할 수 없는 환경으로 변할 거예요." (2편에서 <'매출 5조' 화상경마장, "중독 위험성 크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