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 | 서재근 기자] 재계 서열 1위 삼성의 수장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그룹 전체의 강도 높은 변화와 혁신을 주문한 '신경영 선언'이 세상 밖으로 나온 지 23년이 지났다.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라는 이건희 회장의 일침이 오늘날까지도 삼성의 변화 근간으로 자리 잡고 있는 가운데 최근 현대자동차, SK, LG그룹 등 재계 '빅 4'에서도 총수들이 전면에 나서 과거 이 회장의 '신경영 선언'에 버금가는 환골탈태 수준의 변화를 주문하며 급변하는 경영환경에서의 생존을 위한 혁신방안 마련에 팔을 걷어붙이고 있다.
삼성의 변화는 아직도 진행형이다. 이건희 회장의 장남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그룹 컨트롤타워를 맡은 이후 '잘하는 것에 집중하자'는 실용주의 체제로 전환기에 접어든 삼성은 전자와 금융, 바이오 등 핵심 3대 신수종 사업을 중심축으로 발 빠른 변화에 나서고 있다.
5일 삼성은 사내방송 SBC를 통해 소프트웨어 경쟁력에 대한 고찰과 자기반성 메시지를 담은 특별기획 방송 두 번째 이야기 '삼성 소프트웨어 경쟁력 백서 2부, 우리의 민낯'을 내보냈다. 지난달 21일 첫 번째 방송 '삼성 소프트웨어 경쟁력 백서 1부, 불편한 진실' 편에서 글로벌 기업이라는 외부 평가 뒤에 가려진 부족한 소프트웨어 역량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를 낸 지 2주 만이다. '이재용 체제' 전환 이후 수평적 조직문화로 색깔을 바꿔가고 있는 삼성이지만, 부족한 부분에 있어 '당근'이 아닌 '채찍'을 선택, 할 말은 하는 컨트롤타워의 경영방식은 아버지 세대와 똑 닮아 있다.
이재용식 변화도 속도를 내고 있다. 삼성은 최근 그룹 핵심 계열사인 삼성전자를 중심으로 기존 연공서열적 방식에서 벗어나 철저히 전문성을 중심으로 한 인사제도 개편안을 내놓은 등 대대적인 조직문화 재편에 나섰다. 기존의 부장, 차장, 과장, 대리, 사원 등 7단계의 수직적 직급을 직무역량 발전 정도에 따라 4단계(CL1∼CL4)로 단순화하는 것은 물론 직원 간 호칭 역시 '○○○님'으로 통일하기로 한 것이다.
한 재계 관계자는 "이 같은 삼성의 변화는 발 빠르게 변하는 글로벌 시장환경에 어울리지 않는 고루한 형식에서 벗어나자는 이재용 부회장식 실용주의가 반영된 결과로 보인다"며 "삼성의 변화는 다수 대기업의 변화의 바로미터로 여겨진 만큼 삼성의 조직문화 재편이 국내 재계 전체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현대자동차그룹 역시 정몽구 회장의 진두지휘 아래 기존의 경영 틀에서 벗어나 '고급차'와 '친환경차'를 중심으로 한 투트랙 전략을 내세우며 변화에 속도를 높이고 있다. 기존 대중차 브랜드 이미지 탈피를 위해 럭셔리브랜드 '제네시스' 출범하며 메르세데스-벤츠, BMW 등이 선점하고 있는 고급차 시장에 도전장을 내민 현대차는 최근 친환경차 개발에도 적극적으로 나서며 신성장동력 확보를 위한 발판을 마련하고 있다.
특히, 친환경차 개발에 대한 열의는 상당하다. 현대차의 '아이오닉'과 기아차의 '니로' 등 하이브리드 전용모델을 출시하며 기술력을 증명한 현대차는 오는 2018년까지 차세대 전용 수소전기차 전용 모델을 출시하고, 2020년까지 수소전기차 차종을 2개로 늘려 글로벌 친환경차 시장에서 '톱2'에 진입한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완성차 업계 관계자는 "현대차의 친환경차 개발 프로젝트는 최근 글로벌 완성차 시장에서 '디젤 게이트' 여파가 확산하고 있는 가운데 확실한 대응책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상당한 의미가 있다"며 "미래 기술 선점에 성공한다면 글로벌 브랜드로서 확실하게 자리매김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SK그룹의 수장 최태원 회장도 최근 예정에 없던 '2016년 SK그룹 확대경영회의'를 열고 그룹 주력 계열사 최고경영자(CEO)를 소집, 강도 높은 혁신방안 마련에 앞장설 것을 주문했다. 경영복귀 이후 하이닉스 등 주력 계열사 핵심 시설을 둘러보는 등 분주한 행보를 보인 최 회장이지만, 그룹 수뇌부를 향해 직접 '쓴소리'에 나선 것은 이례적이다.
최 회장은 한자리에 모인 CEO들을 향해 "그룹의 각종 경영지표가 심각한 수준이다. 현재 경영환경 아래 변화하지 않는 기업은 Slow가 아니라 Sudden Death가 될 수 있다"며 "기업 간 경쟁을 전쟁에 비유하는데, 진짜 전쟁이라면 용납할 수 없는 상황이다. 모든 것을 바꾼다는 자세로 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 회장의 깜짝 행보와 관련해 재계에서는 최근 SK그룹 주력 계열사의 부진한 실적이 한몫을 차지한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실제로 SK하이닉스의 경우 시장 불황 여파로 지난 1분기 영업이익(5617억 원)이 전년 대비 65%가량 급감했다. 일각에서는 올 하반기부터 SK그룹의 경영체제에 적지 않은 변화의 바람이 불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SK그룹 관계자는 "최태원 회장의 주문은 급변하는 대외 환경 속에 기민한 대응을 위해 내부에서부터 변화에 나서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라며 "'따로 또 같이'라는 경영철학에서도 알 수 있듯이 SK그룹의 변화는 하달 식으로 이뤄지지 않는 만큼 일방적이고 갑작스러운 변화는 이뤄지지 않겠지만, (최 회장이) 역동적인 변화에 대한 주문에 나선 만큼 기존의 방식과 다른 새로운 변화를 모색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구본무 LG그룹 회장은 불확실한 경영환경에 대한 불안을 여과 없이 드러내며 '생존'을 위한 변화를 강조하고 있다. 구 회장은 지난 5일 서울 여의도 LG트윈타워에서 열린 임원 세미나에서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등 최근 경영 환경의 불확실성이 커진만큼 기민한 대응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틀 바꾸기'에 대한 구 회장의 주문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3월에는 곤지암리조트에서 열린 'LG혁신마당'에서 "지금까지와 차원이 다른 획기적인 혁신이 필요하다"며 경쟁에서 우위에 설 수 있는 이전과 다른 새로운 해법을 제시할 것을 주문 한 바 있다.
구본무 회장의 이 같은 행보는 최근 LG그룹의 경영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그룹 주력 계열사인 LG전자의 경우 전략 스마트폰 'G5'의 부진으로 지난 1분기 2000억 원에 달하는 적자를 기록하는 등 부진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LG그룹은 지난 1일 위기 타개를 위한 대응책의 일환으로 LG전자의 스마트폰 사업을 담당하는 모바일 커뮤니케이션(MC) 사업본부와 관련한 대대적인 조직 개편안을 발표한 바 있다.
한 재계 관계자는 "최근 대기업 총수들이 전면에 나서 대대적인 변화와 혁신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불안한 경제 상황에 대한 위기감'이 반영됐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다"며 "그룹 컨트롤타워가 직접 나서 강도 높은 변화를 주문한 만큼 올 하반기부터 각 그룹사별로 변화의 움직임을 보일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