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 | 이영규 전문기자] 지난달 30일, 하루 종일 대한축구협회를 향했던 국회 청문회장은 한국 축구가 처한 행정적 무능과 윤리적 파산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슬픈 자화상’ 그 자체였다. 그동안 닫힌 문 뒤에서 행해지던 밀실 행정과 자의적 판단이 천하에 공개되었지만, 이를 마주하는 협회 수뇌부와 관계자들의 태도는 성난 축구 팬들과 국민의 가슴에 다시 한번 깊은 생채기를 남겼다.
◆ 본질을 비껴간 프레임 전환과 책임 회피의 기술
가장 씁쓸했던 대목은 청문회장을 채운 책임자들의 총체적인 책임의식 부재와 본질을 벗어난 회피 기술이었다.
2년 전 팬들의 거센 반대와 절차적 공정성 논란을 안은 채 대표팀 사령탑에 올라 2026 북중미 월드컵 조별리그 탈락 대참사를 자초한 홍명보 감독은, 청문위원들의 질의에 본질을 비껴가는 전혀 맥락 없는 답변으로 프레임을 전환해 청문회를 보는 국민들을 속 터지게 했다. 팬들과 청문위원들이 이날 문제 삼은 본질은 ‘선임 과정에서의 절차적 특혜’였으나, 홍 감독은 "빵집에서 면접을 봤다고 해서 어떠한 특혜도 요구하지 않았다"는 식의 비켜간 주장만 앵무새처럼 되풀이했다.
이는 월드컵 실패의 직접적 계기가 된 남아공전 참패 원인을 묻는 취재진에게 "다 분석해봤는데 나도 잘 모르겠다"며 엉뚱한 답변을 하던 모습과 하등 다를 게 없었다. 법인카드 사적 사용 의혹에 대해서도 소명하겠다며 제시한 자료는 개인카드 사용 내역뿐이었다. 법인카드는 공적 업무에만 사용했다는 취지의 해명이었지만, 의혹을 해소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해 보였다.
자신의 잘못을 끝내 인정하지 않고 핵심을 비켜가는 답변으로 일관한 모습은, 의도적으로 논점을 흐리는 프레임 전환이거나 국민이 제기한 의문에 정면으로 답할 의지가 없다는 인상을 남겼다. 그야말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눈치도 보지 않았고, 최소한의 염치조차 없었다.
지난달 6일 사임한 정몽규 전 회장 역시 불리한 질의가 나올 때마다 특유의 어눌한 답변으로 ‘모르쇠’ 전략을 들고 나왔다. 협회의 최고 책임자이자 4연임까지 한 수장이 정작 선거와 관련한 핵심적인 법률과 내부 규정 질의에는 "모른다"로 일관했다. 이는 거대 조직의 리더로서 최소한의 리걸 리스크(Legal Risk) 관리조차 안 되어 있음을 스스로 인증한 무책임의 극치였다.
가장 가관은 문진희 심판위원장의 적반하장식 인식과 태도였다. 한국 심판들이 월드컵 무대에 오르지 못하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 그는 "우리나라는 지면 심판을 욕하는 구조"라는 황당한 답변을 했다. 심판 경쟁력 저하의 원인을 심판계 내부의 제도와 육성 시스템에서 찾기보다 축구팬과 선수, 구단의 문화로 돌린 셈이다. 더욱이 2년 전 회장 선거 당시 공식 선거운동원이 아니면서도 투표권을 가진 심판들을 찾아다니며 정 회장을 지지하도록 강요하거나 회유했다는 취지의 녹취록이 공개됐음에도 그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답하거나 이를 선거운동이 아닌 '관례'라고 치부했다. 심판 배정 및 평가 규정 위반 지적에는 청문위원들을 노려보며 호통까지 쳤다. 자신들이 만든 규정조차 존중하지 않으면서 권위만 내세우는 모습은 협회가 더 이상 스스로를 견제하고 바로잡을 능력을 잃어가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줬다.
이용수 부회장을 비롯한 협회 관계자들 또한 문체부 특정감사 결과 항소 건 등 주요 현안에 대해 "이사회에서 결정하는 일이라 내 소관이 아니다", "답할 처지가 아니다"라며 면피성 발언으로 시간 때우기에 급급했다. 정작 사람은 없고 조직만 있는 이사회 뒤로 숨는 비겁한 ‘방관자 놀이’였으며, 자신들이 누리는 자리와 권한에 따른 엄중한 책임은 완전히 망각한 모습이었다. 이처럼 최소한의 염치도, 책임감도 없는 인물들만 끌어모아 협회 요직을 독점한 이들이 보여준 것은 절대로 책임지지 않은 채 오직 ‘그들만의 리그’를 지키려는 처절한 몸부림뿐이었다.
◆ 현안도 모르는데 혁신? ‘해바라기 행정’만 남은 주무부처
축구협회를 감독하고 바로잡아야 할 주무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의 무기력함은 절망을 더했다. K-축구혁신위원회를 추진하며 SNS로 성과를 홍보해 오던 최휘영 문체부 장관은 이날 청문회에 앞서 달랑 4장짜리 업무보고서로 청문위원들로부터 준비 부족의 질타를 받은 데 이어, 핵심 질의 앞에서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답변을 못 한 채 "자세히 검토해보겠다"는 말만 무한 되풀이하며 실태 파악 미비를 드러냈다.
이날 주무부처 장관의 청문회 준비 태도는 한국 축구 혁신 의지에 대한 진정성을 의심케 했다. 월드컵 참패 후 ‘지휘관의 무능’이나 ‘체육단체장 직선제 확대’ 등 대통령의 지적이 나온 이후 문체부 주도로 급하게 출범한 혁신위의 모습조차, 주무부처의 관심이 '한국 축구의 본질적 체질 개선'이 아닌 '상부 보고용 실적 쌓기'와 대통령의 관심사인 '표면적 선거제 개편'에만 매몰되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자아낸다. 현장의 진짜 현안이 무엇인지 살피는 최소한의 노력도 없이 상부만 바라보는 '해바라기성 행정'으로는 축구협회는 물론 타 종목 스포츠 행정조차 이끌어갈 수 없다.
◆ 사람이 바뀌지 않는 개혁은 영혼 없는 말장난이다
이번 청문회 역시 일부 위원들의 "왜 졌냐?"나 KFA를 KFC로 부르는 등의 부적절한 질의나 주장이 여전히 눈살을 찌푸리게 했지만, 과거 야구 대표팀 선동열 감독을 앉혀놓고 '우승이 뭐 그리 어렵냐'며 핀잔을 주던 식의 황당한 주장이나 막무가내식 호통으로 망신주기에 그쳤던 구태에서는 상당히 벗어났다. 상당수의 청문위원들이 구체적인 제보와 실체적 자료를 바탕으로 협회의 뿌리 깊은 부조리를 공론화했다는 점에서 최소한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날 청문회장에 선 증인들의 무책임과 면피성 답변을 듣고 있노라면, 아무리 훌륭한 시스템과 규정을 도입하더라도 이를 운용하는 이들이 기득권에 안주하는 '고인 물'이라면 어떠한 개혁도 구호에 그칠 뿐이라는 점이 명백해진다.
축구로 누릴 수 있는 명예와 권한은 다 쥐면서, 정작 책임의 순간에는 고개를 돌리는 이들이 요직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한 한국 축구의 미래는 없다. 인적 청산이 전제되지 않은 조직 개혁은 허상에 불과하다. 외면과 회피로 일관했던 인물들이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나고, 진정성 있는 인적 쇄신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한국 축구가 그간의 초라한 자화상을 뒤로하고 새 출발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번 청문회가 다시 한번 매섭게 일깨워준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