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오버뷰] "볼 좀 차봤어?" 비웃는 '무명 지략가'들...한국에 던진 질문은?


투헬·우아비·라푸엔테가 증명한 축구의 새 패러다임
우리도 이제 이름값 빼고 국내외 ‘숨은 고수’ 찾는 오픈 정책 펼쳐야

모하메드 우아비 모로코축구대표팀 감독이 지난30일(한국시간) 열린 2026북중미월드컵 32강 네덜란드전에서 선수들에게 작전 지시를 하고 있다. /몬테레이(멕시코)=신화 뉴시스

[더팩트 | 이영규 전문기자] "볼 좀 차봤어?" "내가 선수 시절에 뛰어봐서 아는데."

오랫동안 축구계를 지배해 온 이 흔해 빠진 통념은 2026 북중미 월드컵을 기점으로 완전히 유효기간이 끝났다. 과거의 축구가 위대한 스타플레이어들의 ‘직관’과 ‘경험’의 복제판이었다면, 지금 북중미의 녹색 잔디 위에서 펼쳐지는 축구는 고도화된 전술 메커니즘과 데이터 분석으로 무장한 지략가들의 ‘설계도’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대한민국 축구가 다시 멈춰 섰다. 홍명보 감독의 사퇴로 사령탑 공백을 맞이한 지금, 축구계의 시선은 또다시 '우리가 잘 아는 이름'들로 향하고 있다. 그동안 대한축구협회의 감독 선임 과정은 지독할 정도로 폐쇄적이었다. 화려한 스타플레이어 출신, 혹은 그들과 인맥으로 얽힌 이너서클 안에서만 정답을 찾으려 했다. 현장 지도력이나 전술적 깊이보다 '이름값'과 '네트워크'가 우선시되던 악순환이었다.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은 움직임이다. 또다시 이름값 위주의 스타플레이어 출신 감독들이 새 사령탑 후보군으로 호명되고 있다. 하지만 이번 월드컵은 한국 축구의 이러한 구태의연한 패러다임에 정면으로 카운터펀치를 날리고 있다.

잉글랜드축구대표팀 토마스 투헬 감독(가운데)이 2일(한국시간) 열린 2026북중미월드컵 32강전에서 콩고민주공화국을 2-1로 꺾은 뒤 선수들과 기뻐하고 있다./ 애틀랜타(미 조지아주)=AP 뉴시스

◆ 변방에서 주류가 된 ‘노트북 사령탑’들

사상 처음으로 48개국 체제로 확대된 이번 북중미 월드컵 사령탑들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세계 축구계에서 소리 없이 진행중인 권력 이동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과거라면 대표팀 근처에도 가기 힘들었을, 프로 무대 경험이 없거나 무명에 그쳤던 ‘비스타·조기 은퇴형’ 감독들이 대거 각국 대표팀의 지휘봉을 잡고 당당히 세계 최고의 무대를 누비고 있다. 이들의 성공은 결코 어쩌다 마주친 특수한 돌풍이 아니다. 화려한 유니폼 대신 전술 노트와 데이터로 무장한 지략가들이 세계 축구의 거대한 ‘주류’로 자리 잡은 것이다.

그 반란의 최전선에 서 있는 인물이 바로 모로코의 16강 돌풍을 지휘한 모하메드 우아비 감독이다. 프로 선수 경력이 전혀 없는 그는 만 21세부터 유소년 코치로 시작해 벨기에 안더레흐트 아카데미 등에서 17년 동안 묵묵히 내공을 쌓았다. 지난 3월 월드컵 직전 왈리드 레그라기 감독을 대신해 소방수로 투입되었음에도 32강전에서 우승 후보 네덜란드를 꺾을 수 있었던 비결은 스타 시절의 감각이 아닌, 뼛속까지 다져진 정통 전술가로서의 분석력이었다.

축구 종가 잉글랜드가 선택한 토마스 투헬 감독 역시 같은 궤를 그린다. 독일 출신으로 선수 시절 1부 리그 무대는 밟아보지도 못한 채 2~4부 리그를 전전하다 만 25세에 무릎 부상으로 은퇴했던 그는, 한때 생계를 위해 바텐더로 일해야 했던 철저한 무명선수 출신이다. 2000년 슈투트가르트 유소년팀 코치로 지도자의 길을 연 그는 오직 탁월한 전술적 역량 하나로 축구 종주국의 자존심을 지탱하는 세계적 명장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스페인 축구대표팀 루이스 데 라 푸엔테 감독이 3일(한국시간) 열린 2026북중미월드컵 32강 오스트리아와의 경기 도중 팀 멤버와 전술에 관한 의견을 나누고 있다. / LA(미 캘리포니아주)=신화 뉴시스

◆ 축구 지도를 뒤흔드는 '재야의 고수들'

전통 강호와 대륙별 복병들의 선택도 이와 다르지 않다. 전차군단 독일을 조별리그 1위로 올려놓고 32강에서 파라과이에 승부차기 끝에 패한 율리안 나겔스만 역시 만 20세에 무릎 부상으로 은퇴해 프로 출전 기록이 아예 없는 ‘0경기’ 출신의 전술 천재이며, 투헬의 은사이자 현대 축구 전술의 대부로 통하는 오스트리아의 랄프 랑닉 또한 프로 경험 없이 아마추어팀에서만 활동한 인물이다.

우승후보 스페인을 이끌고 있는 루이스 데 라 푸엔테 감독 역시 선수 시절 화려한 유니폼이나 스포트라이트와는 거리가 멀었던 무명에 가까운 인물이다. 대신 스페인 연령별 대표팀(U-19, U-21, U-23) 시스템의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전술적 신뢰를 쌓아 올린 끝에 성인 대표팀 지휘봉을 잡았고, 현재 유럽 축구의 패러다임을 주도하고 있다.

독일축구대표팀 율리안 나겔스만 감독이 지난달 30일(한국시간) 열린 2026북중미월드컵 32강 파라과이전에서 선수들에게 작전지시를 하고 있다./ 보스턴(미 매사추세츠주) = AP 뉴시스

여기에 조별리그에서 독일에 충격적인 패배를 안긴 에콰도르의 세바스티안 베카세세 감독 역시 만 22세에 일찌감치 프로 선수의 길을 포기한 인물이다. 그는 이후 무려 15년 동안 아르헨티나 출신의 ‘명장' 호르헤 삼파올리 사단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남미와 세계 축구의 밑바닥부터 단단한 내공을 다졌다. 이번 월드컵은 그야말로 화려한 후광을 걷어낸 진짜 지략가들의 거대한 경연장이 되었다.

평범한 구두 판매원 출신으로 AC 밀란 등 명문 구단 사령탑에 올라 스타플레이어들을 지도하며 압박 축구의 신화를 썼던 아리고 사키 감독은 "기수가 되기 위해 먼저 말이 될 필요는 없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현대 축구는 이 명언이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적용되는 시대다. 스포츠 과학의 발전, 데이터의 고도화, 그리고 촘촘해진 전술적 메커니즘은 단순히 "어디서 볼 찼어?" 식의 직관만으로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섰다.

비선수 출신 감독들은 스타 시절의 아우라로 선수를 누를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렇기에 이들은 철저히 유기적인 소통과 논리적인 전술 제시로 선수들을 설득한다. 현대 축구의 리더십은 ‘권위’가 아닌 선수를 발전시켜 주는 ‘실력’에서 나온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 실패에 이어 2026북중미 월드컵에서도 한국축구대표팀을 이끌고 1승2패 조별탈락한 뒤 감독직에서 사퇴한 홍명보 감독. /몬테레이(멕시코)=AP.뉴시스

◆ 이너서클을 깨고 '오픈 정책'으로 나아갈 때

다시 한국 축구의 현실로 돌아와 보자. 우리는 언제까지 축구협회 고위층의 인맥 지도 안에서, 혹은 국내 언론에 몇 번 오르내린 익숙한 스타 출신들 중에서만 미래를 맡길 것인가. '그들만의 리그'에서 결정되는 폐쇄적인 선임 방식은 결국 전술적 고립과 행정적 불투명성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왔을 뿐이다.

이제는 후보군을 좁히는 이너서클 정치를 타파하고, 국내외를 막론하고 흙 속의 진주를 발굴하는 전면적인 '오픈 정책'을 펼쳐야 한다. 화려한 커리어는 없지만 전세계 하부 리그나 유소년 시스템, 혹은 전술 분석 분야에서 묵묵히 혁신을 시도해 온 숨은 고수들에게 과감히 문호를 개방해야 한다. 편견을 버리고 오직 전술적 역량, 현대 축구 트렌드에 대한 이해도, 그리고 명확한 철학만을 기준으로 심사해야 한다.

북중미 월드컵이 던지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이름값이 승리를 보장하는 시대는 끝났다. 대한민국 축구가 진정으로 혁신하기를 원한다면, 가장 먼저 눈앞의 화려한 이름표를 떼어내고 중원의 진짜 지략가를 찾아 나서는 모험을 시작해야 한다. 화려한 스타플레이어의 유니폼 대신, 밤새 모니터를 보며 전술을 고뇌하고 선수에게 확실한 승리 공식을 주입할 수 있는 진짜 ‘지략가’를 찾아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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