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 | 최순호 전 국가대표] "문제는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보면서도 외면하는 데서 시작된다."
낯선 것보다는 익숙한 것에, 모르는 것보다는 아는 것에, 부조화보다는 편안한 것에 더 호감을 느끼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성향이다. 비록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지만, 이 평범한 심리적 타성은 때로 거대한 조직의 명운을 가르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곤 한다.
시간을 거슬러 2013년 1월, 나는 정몽규 대한축구협회 회장으로부터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현장을 누비던 지도자에서 행정가로 변신하는 기로에서 나는 몇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한국 축구의 뿌리인 유·청소년과 아마추어 부문의 개혁을 전담하겠다는 것, 그리고 이를 뒷받침할 기획단을 만들어달라는 요구였다. 다행히 제안이 받아들여졌고, 이후 4년 동안 해야 할 일에 매진했다. 참으로 바쁘고, 즐겁고, 재미있게 많은 성과를 일궈냈던 아름다운 기억이다.
그 시절, 정 회장의 추천으로 읽었던 한 권의 책은 내 축구 행정가 인생에 깊은 화두를 던졌다. 바로 마거릿 헤퍼넌의 저서 '의도적 눈감기(Willful Blindness)'였다.
저자는 기업의 부정부패, 금융위기, 의료사고, 조직의 실패 등 사회적 비극의 대다수가 ‘몰라서’가 아니라 ‘알면서도 보지 않으려는 태도’에서 비롯된다고 예리하게 분석했다. 인간은 기존의 믿음과 관계를 유지하려는 심리, 권위에 대한 복종, 그리고 집단의 안온한 분위기 때문에 눈앞의 불편한 진실을 의도적으로 외면한다.
죽을 자리를 알면서도 살아날 방도를 찾지 않고 머뭇거리는 격이다. 저자는 이러한 눈감기가 결국 더 큰 실패와 위기를 초래한다고 경고하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서로 다른 의견을 존중하고 불편한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자유로운 토론 문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당시에는 고개를 끄덕이며 읽었던 이 책의 경고가, 수년이 지난 후 나의 가장 아픈 비수가 되어 돌아올 줄은 미처 몰랐다. 2023년부터 2025년까지 수원FC의 단장으로 일하며, 나 역시 이 ‘의도적 눈감기’의 덫에 걸려 빠져나오지 못했음을 고백한다.
익숙한 관행과 편안한 관계에 안주하느라 내부에서 싹트는 시스템의 부조화와 균열을 직시하지 못했다. 문제를 알고도 '어떻게든 되겠지'라며 외면했던 대가는 혹독했다. 결국 팀은 K리그2로 강등되었고, 나는 책임자로서 지휘봉을 내려놓아야 했다. 진실을 외면하는 순간 위험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지고, 문제를 직시하는 용기만이 미래를 바꾼다는 책의 핵심 메시지를 뼈저린 실패를 통해 증명한 셈이 되었다.
이 아픈 고백을 다시 꺼내는 이유는 작금의 한국 축구가 마주한 현실이 '의도적 눈감기'의 거대한 실험실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최근 국가대표팀을 둘러싼 전술 부재 논란, 무색무취한 경기력, 그리고 소통이 단절된 행정 시스템은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니다. 수많은 전문가와 팬들이 끊임없이 경고등을 켜왔음에도, 축구계 주류는 '우물 안의 안온함'과 '권위' 뒤에 숨어 눈을 감았다. 시스템의 붕괴를 보면서도 외면하는 태도, 그것이 바로 한국 축구를 위기로 몰아넣는 진짜 몸통이다.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는 "오류를 범하는 것은 인간적이지만, 그 오류를 고집하는 것은 악마적인 것이다"라고 했다. 실패보다 무서운 것은 실패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않으려는 오만이다. 한국 축구가 다시 일어서기 위해서는 지금 당장 감았던 눈을 떠야 한다. 쓴소리를 품어 안는 토론 문화를 회복하고, 갉아먹고 있는 내부의 부조리를 완전히 도려내는 '직시의 용기'가 필요한 때다. 나 역시 한 명의 축구인으로서, 내가 걸려 넘어졌던 그 덫을 우리 축구가 반복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