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 | 최순호 전 국가대표] "암흑의 터널을 지나며 마주한 한국 축구의 민낯"
1982년 스페인 월드컵 본선 진출 좌절 이후, 한국 축구는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1982년 3월부터 1985년 2월까지의 3년은 지금 돌아보면 한국 축구사의 거대한 ‘암흑기’였다. 흔히 시설의 낙후와 행정의 부재 같은 외적 환경을 탓하지만, 진짜 문제는 내부에 있었다. 감독 선임의 일관성 결여, 파벌에 치우친 선수 구성, 주먹구구식 훈련 과정 등 대표팀 운영 전반의 구조적 한계가 한국 축구의 발목을 잡았다.
명확한 축구 철학도, 미래를 향한 방향성도 없었으니 조직력이 안정될 리 만무했다. 당시 국가대표 선수로서 그 황량한 현장을 온몸으로 겪었던 나는,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깨달았다. 그 시절 우리가 통과했던 터널이 얼마나 깊고 어두운 구조적 모순의 늪이었는지를 말이다. 맹목적인 투혼만으로는 세계의 벽을 넘을 수 없다는 값비싼 교훈을 얻은 암담한 시기였다.
"'귤화위지(橘化爲枳)'를 넘어선 1985년 봄의 대전환"
중국의 고사성어에 ‘귤화위지(橘化爲枳)’라는 말이 있다. 귤나무를 회남에 심으면 탱자가 된다는 뜻으로, 환경과 리더십이 사람을 어떻게 바꾸는지를 비유한다. 암흑의 늪에서 허우적대던 대표팀은 1985년 봄, 김정남 감독 체제라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며 귤 본연의 빛깔을 되찾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바뀐 것은 인적 쇄신과 신구 조화였다. 조광래, 박창선, 조영증, 허정무 등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들이 중심을 잡았고, 김주성, 조민국, 김삼수, 노수진 같은 겁 없는 신예들이 활력을 불어넣었다. 여기에 조병득, 오연교, 정용환, 박경훈, 변병주, 그리고 나를 비롯한 허리 세대의 중진 선수들이 신구(新舊)의 가교 역할을 하며 비로소 안정적인 전력을 구축했다.
과거의 관행을 깨고 오직 ‘실력과 전술적 부합성’이라는 엄격한 기준 속에서 선수가 선발되자, 대표팀 내부에는 건강한 긴장감과 치열한 무한 경쟁이 시작됐다. 현대 경영학의 아버지 피터 드러커는 "경영은 올바르게 일을 하는 것이고, 리더십은 올바른 일을 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방향성이 확실한 리더십 아래 감독의 축구 철학과 선수들의 열정이 비로소 하나로 수렴되면서, 대표팀은 하루가 다르게 단단해졌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이후 무려 32년 동안 밟지 못했던 ‘월드컵 본선 진출’이라는 꿈이 구체적인 현실로 다가오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도쿄와 잠실의 기적"
모든 위대한 성취는 안과 밖이 함께 호응할 때 이루어진다. 병아리가 알에서 나오기 위해 안에서 껍질을 쪼는 것을 ‘줄(啐)’이라 하고, 어미 닭이 밖에서 껍질을 깨뜨려 주는 것을 ‘탁(啄)’이라 한다.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이루어져야 생명이 탄생한다는 ‘줄탁동시(啐啄同時)’의 이치처럼, 1985년 가을의 한국 축구가 바로 그러했다.
1985년 10월 26일, 일본 도쿄 국립경기장에서 열린 멕시코 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1차전 원정 경기. 6만 2천여 명의 일방적인 홈 응원단 앞에서도 우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정용환의 선제골과 이태호의 추가골로 2-1 승리를 거둔 것은 지도자의 치밀한 상대 분석과 전술, 그리고 그 전술을 그라운드에서 100% 구현해 낸 선수들의 눈물겨운 헌신이 맞물린 ‘줄탁’의 결과물이었다.
그리고 일주일 뒤인 11월 3일, 서울 잠실종합운동장에서 열린 2차전은 경기 시작 몇 시간 전부터 7만 관중의 뜨거운 함성으로 가득 찬 거대한 축제의 장이었다. 온 국민의 염원이 밖에서 ‘탁’ 하고 두드렸고, 우리 선수들은 그라운드 위에서 온 힘을 다해 뛰며 안에서 ‘줄’ 했다. 허정무의 결승골로 마침내 1- 0 승리, 통합 스코어 3-1로 32년 만의 월드컵 본선 진출을 확정 지은 순간 잠실벌은 거대한 감동의 도가니로 변했다.
그날의 승리는 단순한 축구 경기에서의 90분 승리가 아니었다. 사령탑의 탁월한 전략, 선수들의 숭고한 투혼,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들의 뜨거운 에너지가 삼위일체를 이루어 만들어 낸 역사적 작품이었다. 그것은 암흑기라는 과거의 관습과 구태를 탈피하고 변혁을 택한 한국 축구가 세계 무대로 당당히 걸어 나간 위대한 이정표였으며, 마흔 해에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도 내 가슴속에 가장 뜨거운 불꽃으로 살아 숨 쉬고 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