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대륙의 전통 깬 미국 실용주의...축구마저 삼켰다 [유병철의 스포츠 렉시오]


하이드레이션 브레이크 전면 도입
오래된 ‘쿼터제 축구’의 바람이 현실로
시계가 멈추는 15분 4쿼터제는?

6일(한국시간) 2026 북중미 FIFA월드컵 A조 한국-체코 전이 열릴 멕시코의 과달라하라 스타디움 전경. 오는 12일 11시 한국의 첫 경기를 앞두고 관계자들이 막판 시설물 작업을 하고 있다. / 뉴시스

[더팩트 l 유병철 전문기자] # 이번 2026 FIFA 북중미 월드컵은 또 다른 측면에서 축구 역사에 새로운 이정표가 될 것 같습니다. ‘수분 보충 휴식시간’으로 번역되는 하이드레이션 브레이크(Hydration Break, 이하 HB)가 처음으로 도입되기 때문입니다. 말이 어렵죠? 사실상 축구에 ‘4쿼터제’가 도입되는 겁니다. HB는 전후반 22분께에 강제적으로 주어지는 3분간의 휴식시간입니다. 기존의 전후반 각 45분(하프타임 15분)에서 ‘22분--23분-하프타임(15분)-22분--23분’으로 바뀌는 것이죠. 추가시간(AT)은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HB로 인해 이전보다 훨씬 길어지겠지만요. 어쨌든 이제 축구는 4쿼터제(NBA 12분, FIBA 10분)의 농구와 다를 게 없습니다. 쉬는 시간만 보면 하프타임은 같고, HB는 쿼터타임(농구 2분~3분30초)과 비슷합니다. 15분 4쿼터제인 미식축구(NFL)와도 궤를 같이 합니다.

# 갑자기 이렇게 됐을까요? 아닙니다. FIFA의 HB 도입 발표는 2025년 12월에 나왔지만 ‘축구의 쿼터제 도입’은 역사가 오래됐습니다. '스포츠 천국‘ 미국에서는 사실 1910년대 대학스포츠에서 농구, 미식축구와 함께 축구도 4쿼터제(각 15분)으로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상업광고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했으니까요. 농구와 미식축구가 이후 미국인의 인기스포츠로 발전하면서 4쿼터제가 정착한 반면, 축구는 관심 밖 종목이 되면서 해외를 따라 전후반제로 회귀했죠. 1996년 미국프로축구(MLS)가 출범할 당시, 방송사와 협회는 광고 수익 극대화를 위해 4쿼터를 강하게 제안했으나 전통을 중시한 FIFA의 반대로 무산됐습니다.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유소년 축구(U-10, U-12 등), 공수전환이 잦은 실내 축구에서는 체력부담 완화와 경기력 유지를 위해 4쿼터제가 실시돼 왔습니다.

쿨링 브레이크와 하이드레이션 브레이크 비교. 하이드레이션 브레이크는 강제성이 있는 만큼 사실상의 쿼터제 도입으로 해석된다. / 제미나이

# 울고 싶은 데 뺨 때려준 격이라고 할까요? 지구 온난화로 ‘뜨거운 여름’이 매년 이슈로 등장하자 쿼터제가 군불을 지핍니다. FIFA는 2014 브라질 월드컵부터 쿨링(Cooling) 브레이크를 도입했습니다. 더위가 일정 수준 이상이 되면 심판의 제량으로 수분 섭취 및 휴식시간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 제도는 2016 코파 아메리카에도 채택됐고, 이후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 아프리카 네이션스 컵. FIFA 클럽월드컵 2025에서 실시됐습니다. 심지어 영국 프리미어리그도 비슷한 개념의 드링스(Drinks) 브레이크를 도입했죠. 스페인 라리가와 미국 MLS도 '쿨링 대열'에 참석했고, 미국대학스포츠협의회(NCAA)는 2019년부터 축구에 의무성이 추가된 쿨링 브레이크를 운영해왔습니다.

# 여름철 더위가 죽었던 축구의 쿼터제를 살려내는 결정판이 이번 북중미월드컵의 HB입니다. 선택이 아니라 의무입니다. 겉으로는 선수보호, 경기력 확보 등을 내세우지만 실질적으로 ‘확실한 상업광고 시간 확보’가 더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또 보다 인문학적으로 접근하면 지구촌 패권이 영국에서 미국으로 넘어왔듯이, 스포츠도 구대륙(영국, 혹은 유럽)에서 신대륙(미국) 스타일로 바뀐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 스포츠는 ‘절대적인 규칙은 없으며, 더 나은 결과(승리와 흥행)를 위해서라면 제도와 기술을 언제든 수정할 수 있다’는 프래그머티즘(실용주의)의 원리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무승부를 싫어해 가능한 승부를 내려하고, 비디오 판독 도입에 적극적이죠.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에, 스포츠에서도 ‘미국화[americanization]’가 거센 것입니다.

지난 1일 세네갈 전에서 3-2로 승리한 미국 축구대표팀의 모습. 포체티노 감독(가운데)이 하이드레이션 브레이크 때 선수들에게 노트북을 편 채 작전지시를 하는 장면으로 크게 화제가 됐다. 포체티노 감독은 당초 하이드레이션 브레이크 도입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최근 이를 적극 활용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영국의 <가디언>은 미국 축구 대표팀이 노트북 앞에 모여, 월드컵 여정의 첫번째 밈이 될 순간을 만들었다고 보도했다. / 중계화면 캡처

# 그런데 HB 도입에도 불구하고 축구에서 아직 결정적으로 바뀌지 않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시간의 연속성’입니다. 영국에서 시작된 축구와 럭비는 심판의 경기시작 휘슬이 불면 경기시간을 나타내는 시계는 멈추지 않습니다. 축구는 전후반 45분씩, 럭비는 전후반 40분씩 시간이 스톱 없이 흐릅니다. 마지막에 추가시간이 주어질 뿐이죠. 쿼터제인 농구와 미식축구는 플레이가 중단되면 시계도 멈춥니다. 철저하게 인플레이 시간만 계산되죠. 반면 축구는 대충하는 겁니다. 2017년 국제축구협회 평의회(IFAB)가 5개 주요 국제대회를 대상으로 한 경기에서 실제 공이 움직인 시간을 측정했더니 평균 52~62분이 나왔습니다. 2018 러시아 월드컵의 경우, 경기당 평균 13분 안팎의 추가시간이 주어져야 했지만 실제로는 7분 정도가 선언됐습니다. 이에 전후반을 30분씩(쿼터제는 15분씩)으로 줄이되 플레이가 멈춰지면 시계를 멈추자는 의견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습니다.

# 어쨌든 완벽하지는 않지만 사실상의 쿼터제가 이제 곧 월드컵 무대에서 시행됩니다. 진정한 쿼터제처럼 시계가 멈추지 않는 까닭에 추가시간은 10분 이상으로 늘어납니다. 대규모 중간광고 도입과 같은 돈 얘기에는 차치하죠. 그 정도는 일단 참으면 되니까요. 하지만 경기는 다릅니다. 그렇지 않아도 경기 종료 10분 전, 5분 전이 중요하다는 현대축구에서 전술적 패러다임이 어떻게 변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정말 궁금합니다.

코칭스태프의 전술은 정말이지 중요해졌습니다. 승부처인 HB에서 작전지시는 주효했는지, 선수교체가 제대로 이뤄졌는지 혹독한 검증이 이뤄질 것입니다. 체력 부담이 완화되면서 ‘게겐프레싱’ 같은 전술이 인기를 끌지도 모르겠습니다. 추가시간이 늘어나면서 막판 집중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듯합니다. 그런데 이런 변화가 한국대표팀에 유리할 것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못난 지도자들 밑에서도 훌륭한 나라를 만들어온 우리네의 ‘종특’을 믿어보는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한국의 첫 경기인 체코 전은 오는 12일(금) 오전 11시에 시작합니다.

한국 축구 대표팀이 지난 3월 코트디부아르와의 친선경기 중 하이드레이션 브레이크를 보내고 있는 장면. 각종 구설에 오른 홍명보 감독이 새로운 하이드레이션 브레이크를 어떻게 활용할지 기대와 걱정이 교차되고 있다. / 대한축구협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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