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 l 유병철 전문기자] # 지난 5월 25일(한국시간), 이집트의 기자에서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자본을 대고, 피라미드를 배경으로 한 화제의 복싱이벤트가 펼쳐졌습니다. 최중량급이니 지구촌 복싱 최강자를 가린다고 할 수 있는데, 바로 ‘그로리 인 기자(Glory in Giza)’였습니다. 이견이 없는 무패의 헤비급 통합챔피언 올렉산드르 우식(39 우크라이나)이 역시 무패의 킥복싱 챔피언인 리코 베르후번(37 네덜란드)을 상대로 WBC 방어전을 치른 것이죠. 당초 역대급 헤비급 챔피언으로 꼽히는 우식이 복싱전적 1전에 불과한 베르후번을 쉽게 요리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WBC만 공식방어전으로 인정했을 뿐 WBA와 IBF는 우식이 패했을 경우 챔피언 자리를 공석으로 처리하겠다며 승인하지 않았죠.
# 결과는 우식의 11회 TKO승이니 예상이 적중한 듯싶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10회까지 베르후번이 우세한 경기를 펼쳤고(10회까지 심판 2명은 95-95 동점, 1명은 96-94 도전자 우세), 심판이 라운드 종료 1초를 남기고 TKO를 선언했기 때문입니다. 11회가 되자 판정의 열세를 느낀 우식이 공세를 펼쳤고, 강력한 어퍼컷으로 다운을 뺏었습니다. 이후 우식은 주먹을 퍼부었고, 베르후번은 수비적이었지만 지속적으로 펀치를 내고 있었죠. 그런데 2분59초에 심판이 경기를 중단시킨 겁니다. 우식은 25승(16KO)의 무패행진을 이어갔고, 격투기에서 22승무패를 기록했던 베르후번은 프로복싱 1승1패를 기록했습니다.
# 당연히 큰 논란을 일었습니다. 베르후번 측은 판정에 대해 공식적으로 항소를 제기해 경기무효를 추진한다고 합니다. 다수의 미디어도 ‘우식의 진땀승’을 거론했고, 심지어 ‘복싱 역사상 최대의 이변이 오심으로 날아갔다’는 강한 표현까지 나왔습니다. 챔피언 우식도 "내가 진 줄 알았다"고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우식의 전 프로모터 알렉스 크라시우크는 "(우식은) 지금까지 내가 본 것 중 가장 몸이 무거웠다. 지금 당장 은퇴해야 한다."고 일갈했습니다. 인기유튜버 겸 복서인 제이크 폴은 "나는 우식의 팬이지만, 브로(우식), 이 경기는 네가 졌어"라고 소셜미디어에 글을 남겼습니다. 우식이 예상을 깨고, 고전한 것은 확실하고 향후 둘은 재대결을 벌일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우식의 졸전(?)이 단순히 에이징 커브 때문일까요? 2012년 런던 올림픽 헤비급 금메달리스트인 우식(아마추어 335승 15패)은 2013년 프로전향 후 경이적인 경기력을 선보였습니다. 펀치파워, 테크닉, 지구력 등에서 역대 최고라는 평가를 받아왔죠. 특히 지난 4년간 타이슨 퓨리, 앤서니 조슈아, 다니엘 뒤보아(이상 영국)를 각각 2차례씩 제압하며 만장일치 최고의 헤비급챔피언이 됐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에이징 커브라고요? 그것도 킥복싱 출신 선수한테요? 비밀의 단초는 이번 타이틀매치 전 베르후번이 밝힌 각오에 있습나다. "(사람들은 내가 절대적으로 불리하다고 하는데)내 스탠스와 움직임은 다르다. 내가 신체적으로 더 크고, 운동능력도 좋다. 우식은 20kg차의 펀치를 느끼게 될 것이다."(BBC스포츠)
# 그렇습니다. 단순히 경기내용만 따질 것이 아니라, 이번 ‘피라미드 격투’는 싸움의 기술에서 기본 중의 기본인 ‘체급’의 중요성을 일깨워준 것입니다. 시쳇말로 ‘체급이 깡패’라는 것이죠. 사실 생태계에서도 코끼리, 코뿔소 같은 대형 동물은 사자나 호랑이도 쉽게 범접하지 못할 정도로 천적이 없습니다. 바다에서 수십 톤이 나가는 초대형고래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도 비슷해서 대부분의 대련 스포츠는 체급을 나누고 있고, 복싱처럼 체격이 경기력에 미치는 영향이 클수록 체급은 세분화됩니다. 작은 체구의 선수가 큰 덩치의 상대를 제압하는 것은 짜릿하지만, 직업적으로 격투훈련을 하는 전문선수들의 세계에서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서 매니 파퀴아오의 8체급 석권과 같은 다체급 석권이 위대한 것이죠. 키는 늘리기 어려우니, 근육 위주로 체중을 늘려야 하는데 이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또 180cm(100kg)의 ‘작은’ 키로 헤비급을 평정했던 마이크 타이슨도 이 점에서 더욱 높은 평가를 받는 겁니다.
# 체급월장과 경기력 영역에서는 5체급을 석권하고 무패(50승 27KO)의 전적을 가지고 있는 플로이드 메이웨더(49 미국)가 대표적입니다. 슈퍼페더급에서 뛸 때는 KO율이 80%에 달하는 ‘KO 머신’이었습니다. 하지만 라이트급으로 월장하자 KO율은 50% 밑으로 떨어졌고, 웰터급에서는 아예 ‘판정머신’이 됐습니다. 특히 2021년 로건 폴(제이크 폴의 형)과의 이벤트 경기에서는 아무리 프로급 실력을 가졌다고는 해도 유투버인 상대를 쓰러뜨리지 못했습니다. 18cm가 크고, 20kg이 더 나간 로건 폴이 월등한 신체조건과 파워를 바탕으로 버텼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20kg 이상 차이가 선수들의 격투경기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 우식을 보죠. 우식은 크루저급(90.7kg이하)으로 프로에 뛰었습니다. 가공할 펀치력을 앞세워 4대 기구 통합챔피언에 올랐고, 헤비급(90.7kg초과)으로 월장한 후에도 4대기구를 평정했습니다. 두 체급에서 4대 기구를 제패한 것은 헤비급 최초이자, 프로복싱 통산 3번째입니다(테렌스 크로포드, 이노에우 나고야). 헤비급으로는 다소 작은 사이즈로 최고의 업적을 세운 것입니다. 그래도 타고난 신체조건(191cm)을 근본적으로 극복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식의 KO율은 크루저급에서는 68.7%(16승 11KO)였지만, 헤비급에서는 이번 경기를 포함해 55.5%(9승 5KO)로 떨어졌습니다. 주요 상대를 봐도 체격이 큰 퓨리(206cm 125kg)나 조슈아(199cm 108kg)에게는 두 번 모두 판정승에 그쳤고, 상대적으로 작은 뒤보아(196cm 103kg)에게만 KO승을 거뒀습니다.
# 우식의 이번 상대 베르후번은 196cm에 117.3kg이었습니다. 이에 우식은 자신의 역대 최고 경기체중인 105kg으로 맞섰습니다. 이건 하루 전에 실시하는 계체체중이니 ‘리게이닝(Regaining)’을 고려하면 차이는 더 클 겁니다. 체중을 늘리다 보니 우식도 특유의 빠른 발놀림과 스피드가 둔해지는 악영향이 발생했습니다. 어쨌든 그래도 역전 KO승을 거뒀으니 오히려 퓨리 전에 비하면 선전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했으니 정말 뛰어난 복서인 것 같습니다. 우식은 앞으로 두 번 경기를 치른 후 은퇴할 예정입니다. 호적수가 없어 그의 은퇴행보가 싱겁지 않을까 우려했는데, 베르후번과의 리턴매치 등 볼거리가 많아졌습니다. 다음 우식의 상대는? 그리고 우식의 체중과 경기력은 어떨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