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 l 유병철 전문기자] # ‘규칙이 정해진 신체적 경쟁’이라는 스포츠의 5대 속성 중 하나는 ‘(현실)분리성’입니다. 현실과는 다른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이 흥미롭고, 대리만족에 카타르시스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가장 극적으로는 전쟁 패배나 식민지배 등 현실의 상처를 스포츠에서 되갚아주는 설욕드라마가 있습니다.
스포츠 역사에서는 1956년 멜버른 올림픽 남자수구의 헝가리, 1986년 멕시코 월드컵의 아르헨티나, 1948년 런던 올림픽 남자하키의 인도 등이 대표적인 사례로 꼽힙니다. 그런데 야구에서 이들을 모두 능가할 만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바로 지난 3월 17일(한국시간 18일 오전) 베네수엘라의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우승입니다.
# 야구의 본고장 미국에서 열린 WBC(월드베이스볼클래식) 결승전은 잘 알려진 것처럼 ‘마두로 더비’로 불렸습니다. 지난 1월 3일 최강대국 미국이 특수부대를 베네수엘라로 보내 마두로 대통령을 체포했기에 그렇습니다. 독재, 경제파탄, 마약밀매 등 마두로의 실정이 이유라고 하는데, 그렇다고 해도 무력으로 한 나라의 현직대통령을 데려간 것은 충격이었습니다.
이후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의 최고지도자를 폭격으로 ‘참수’하는, 더한 일도 발생했으니 참 험한 세상입니다. 어쨌든 이런 상황에서 언더독으로 평가받은 베네수엘라는 야구의 본고장 미국에서 명승부 끝에 미국을 3-2로 꺾고 우승했으니 도파민이 폭발하는 겁니다. 생중계를 본 베네수엘라 사람들은 거리로 나와 환호했고, 임시대통령(부통령)은 임시공휴일을 선포했습니다.
# 비슷한 역사적 사례로 첫 손에 꼽히는 것은 1956년 ‘멜버른의 유혈사태’ 혹은 ‘물속의 피(Blood in the Water) 사건’입니다. 앞서 같은 해 11월, 소련군은 헝가리 혁명을 무력으로 진압하며 약 2,500명의 사망자를 냈습니다. 멜버른 올림픽은 11월 22일 개막했고, 12월 6일 남자 수구 준결승에서 헝가리와 소련이 맞붙었죠. 감정이 좋지 않은 양 팀 선수들은 물속에서 격투에 가까운 몸싸움을 벌였고, 헝가리가 4-0으로 앞섰습니다.
경기 종료 직전 헝가리의 에이스 에르빈 자도르가 소련 선수에게 맞아 눈가가 터져 피를 많이 흘렸습니다. 수영장 물이 붉게 물들 정도였습니다. 경기가 중단됐고 이대로 승리한 헝가리는 결승에서 유고슬라비아를 꺾고 금메달을 땄습니다. 헝가리 선수 중 다수는 귀국하지 않고 망명을 선택했습니다.
# 디에고 마라도나의 ‘신의 손’ 사건이 나온 멕시코 월드컵 8강전은 아주 유명합니다. 4년 전인 1982년 아르헨티나는 포클랜드(말비나스) 전쟁에서 영국에 참패하며 국가적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4년 뒤인 1986년 6월 22일, 아르헨티나는 월드컵 8강 영국(잉글랜드)을 만났죠.
마라도나는 후반 6분 ‘신의 손’ 골, 후반 10분 수비수 5명을 제친 '세기적인 골'을 터트리며 2-1로 승리했습니다. 아르헨티나는 이후 벨기에, 서독을 연파하며 FIFA컵을 차지했죠. 마라도나는 훗날 자서전에서 이 경기에 대해 " 축구 경기 이상의 의미였다. 우리는 전쟁에서 자식을 잃은 아르헨티나 어머니들을 위해 싸웠다"고 회상했습니다.
# 세 번째는 ‘식민지 피지배국이 제국주의 심장부에서 거둔 승리’로 유명한 인도와 영국의 런던 올림픽 필드하키 결승전입니다. 인도는 200년 가까이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았고, 1947년 독립 후 1948년 런던 올림픽에 '인도 공화국'으로 처음 참가했습니다. 결과는 인도의 4-0으로 완승. 영국의 런던 한복판(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인도국기가 유니언잭(영국국기)보다 더 높이 올려지고, 인도국가가 울려 퍼지자, 인도는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습니다. 단순한 올림픽 우승을 넘어 완전한 독립을 상징하는 사건이었습니다.
# 위 세 사건과 이번 베네수엘라의 마두로 더비 승리를 비교하면 어떨까요? 먼저 세 사건에서 승리를 따낸 약소국 팀은 언더독이 아니었습니다. 헝가리는 수구가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도입된 이래 최강자였습니다. 멜버른에 앞선 두 번의 올림픽에서도 은메달-금메달을 땄죠. 축구에서도 아르헨티나가 잉글랜드에 비해 나으면 나았지 절대 뒤지지 않습니다.
인도의 남자하키도 독립 전 ‘영국령 인도제국’으로 참가했고, 이미 3연속 금메달을 딴 상태에서 1948년 4연패에 성공한 겁니다. 베네수엘라가 야구 강국이고, 주전 대부분이 메이저리그 선수이지만 팀 연봉에서 1억9,145만 달러(약 2,875억원)로 미국( 3억8,327만 달러, 5,755억원)의 절반 수준입니다. 전력상 확실한 열세였습니다.
# 여기에 세 사건 중 결승전은 하키뿐이었고, 나머지 둘은 4강과 8강이었습니다. 장소가 ‘적지’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사적 아픔과 스포츠 설욕이 시간적 간격도 수구만 가까울 뿐 포클랜드 전쟁(축구)과 인도의 식민지배는 좀 떨어져 있습니다.
종목의 인기도도 야구는 축구에 뒤질 뿐 수구와 하키보다는 앞섭니다. 이러니 이번 베네수엘라의 마두로 더비 승리는 스포츠 역사에서 현실의 상처를 스포츠로 위로하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손색이 없습니다. 스포츠에 신이 있다면 현실이 좀 심하다 싶을 때 이렇게 한 번씩 메시지를 보내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