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 l 유병철 전문기자] #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난 12월초 미국프로농구(NBA)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킨 무명 선수가 한 명 있습니다. 190cm의 ‘작은 키’, 덥수룩한 수염으로 실제 나이(1996년생)보다 더 들어 보이는 평범한 인상, 여기에 어머니가 좋아한다고 해서 계속 입고 나오는 촌스러운 언더셔츠 패션까지. 딱 보면 '진짜 NBA선수 맞나' 싶을 정도죠.
팻 스펜서라는 29살의 벤치멤버입니다. ‘리빙 레전드’ 스테판 커리가 뛰고 있는 골든스테이트 소속인데, 정식계약이 아닌 투웨이 계약이니 일종의 ‘임시직’이라 할 수 있죠. 이 선수가 커리, 드레이먼드 그린 등 주전들이 대거 빠진 상태에서 빼어난 활약으로 팀승리를 이끌어 화제가 됐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알고 보니 이 선수, ‘라크로스’라는 스포츠에서 미국대학리그(NCAA) 역대급 선수였다네요. 농구가 좋아서, 미래가 보장된 꽃길 대신 가시밭길을 걷고 있는 겁니다.
# 스펜서는 스포츠 집안 출신입니다. 아버지는 테니스와 골프를 즐겼고, 어머니는 대학 2학년까지 농구선수였죠. 온 집안이 운동을 즐겼고, 특히 4살 동생 캠 스펜서와는 어려서부터 농구 일대일 대결로 시간을 보내곤 했습니다. 명문 코네티컷 대학을 나온 캠은 현재 NBA 멤피스에 적을 두고 있습니다. 농구가 첫 사랑이었지만 스펜서는 중학교 2학년 때 키가 작아 라크로스에 전념합니다. 중고교 때 패배를 몰랐고, 로욜라 대학에 진학해 전미 최고의 라크로스 선수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NCAA 역사상 최다 어시스트(231개), 득점 2위(380점)를 기록하고, 라크로스 계의 하이즈먼 트로피(대학풋볼 최고의 선수상)인 테와라톤 상을 받았습니다. 2019년 프리미어라크로스리그(PLL) 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를 받았죠.
# 스펜서는 대학 최고의 라크로스 선수였지만, 대학시절에도 ‘몰래’ 농구를 즐겼습니다. 툭 하면 농구장을 찾아 "왜 라크로스 선수가 농구를 하냐?"는 얘기를 듣곤 했죠. 마침 키도 190cm까지 성장해 제대로 농구를 해보고 싶다는 열망이 커졌습니다. 스펜서는 어려운 결정을 내렸습니다. 라크로스 프로 1순위를 거절하고, 로욜라 대학 졸업 후 노스웨스턴 대학으로 편입해 정식 농구선수가 됐습니다. 대학을 5년 다닌 것이죠.
하지만 팀이 워낙 약체였고, 이렇다 할 활약을 펼치지 못해 2020 NBA 드래프트에서 지명을 받지 못했습니다. 어머니도 걱정했습니다. "라크로스 쪽은 모든 게 갖춰져 있는데, 정말 이 길이 맞는 거니?"라고 말이죠. 하지만 스펜서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2021년 독일 프로리그(함부르크 타워스)로 가 3달을 지냈죠. 귀국 후 부모의 도움을 받아 라스베이거스 서머리그에 참석했고, 여기서 워싱턴 위저즈의 단장에게 다가가 자신을 어필해 공개 트라이아웃 기회를 얻었습니다. 간신히 워싱턴 산하 G리그팀인 캐피털시티 고고와 계약했고, 1년 후 골든스테이트 산하 산타크루즈 워리어스로 이적했습니다. NBA의 2부리그인 G리그 선수가 된 겁니다.
# 이 정도 열정이면 그의 선수생활은 짐작이 갈 겁니다. 스펜서의 성실함과 노력은 주변 사람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입니다. NBA에서도 거칠기로 유명한 드레이먼드 그린은 "팀 연습 후 스크리미지하는데, 늘 스펜서에게 압도당했다. 열 받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게 바로 팻(스펜서)이다. 그런 에너지를 매일 가져온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집념을 가지고 노력하니 그의 농구기량은 늘 우상향이었습니다.
예컨대 3점슛 성공률은 대학 시절 23.5%로 참담한 수준이었으나, 이제는 40%를 상회합니다. 여기에 라크로스로 단련된 탄탄한 몸과 뛰어난 운동능력, 패스 등 탁월한 공간감각을 갖췄으니 발전속도가 빨랐죠. G리그에서 첫 두 시즌은 평균 7점대였으나 23~24시즌 14.5득점, 6.2리바운드, 4.6어시스트를 기록하며 골든스테이트의 부름을 받았습니다(투웨이 계약). 스펜서는 2024년 2월 26일 덴버와의 경기에서 NBA선수의 꿈을 이뤘습니다.
# 이어 스펜서는 24-25시즌 골든스테이트의 벤치멤버로 39경기에 출전해 평균 2.5득점을 기록했습니다. 잠시 정식계약을 맺어 플레이오프도 8경기에 출전해 평균 8분을 뛰며 4.5득점으로 알짜배기 활약을 펼쳤습니다. 올시즌(25-26시즌)에도 다시 투웨이 계약(NBA팀과 G리그 팀에 동시 등록)을 맺은 스펜서는 19경기에 뛰었는데 출전시간을 늘리며 각종 개인기록을 크게 향상시켰습니다. 특히 커리 등 주전들이 대거 빠진 11월말~12월초 5경기에서 주전으로 팀을 3승2패로 이끌었습니다. 지난 6일 클리블랜드 전에서는 19득점 4리바운드 7어시스트를 기록했는데, 4쿼터에만 12점을 집중하며 인생경기를 펼쳤습니다. 19득점은 스펜서의 커리어 하이입니다.
# ‘나이 많은 신인’ 스펜서가 펼치는 집념의 NBA 도전기는 현재진행형입니다. 워낙 그의 활약이 빼어나 커리 등 주전들이 복귀하면 출전기회가 없을 것이라는 걱정이 화제가 되기도 했죠. 팬들이 그의 도전을 계속 보고 싶었던 겁니다. 다행히도 스티븐 커 감독은 스펜서의 열정을 좋아합니다. "둘이 함께 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고, 실제로 지난 12일 커리가 복귀한 후에도 스펜서를 나름 중용하고 있습니다. 사실 스펜서는 지난 시즌 후 다른 팀의 러브콜(정식계약)을 받았지만 거절했습니다. 어려울 때 자신을 선택한 골든스테이트와의 의리를 고려해 팀에 남은 것이죠. 스펜서의 삶 자체가 영화의 소재로 부족함이 없는 드라마인 것 같습니다.
# 스펜서의 등번호는 61번입니다. 우리네에게는 ‘코리언 특급’ 박찬호의 상징(원래는 아마추어시절 달았던 16번을 원했으나, LA다저스의 선배 노모 히데오가 달고 있어 61번으로 변경)으로 유명하지만, NBA에서는 스펜서가 유일할 정도로 드문 번호입니다. 의미는 두 가지입니다. NBA 드래프트는 60명을 지명하죠. 61번은 지명받지 못한 선수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라크로스 최고의 선수였을 때 스펜서는 7번을 달았습니다. 6+1은 7이죠. 농구에서도 최고에 도전한다는 집념을 담았습니다.
스펜서의 삶은 평범한 우리들에게 긍정적인 자극을 줍니다.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꼭 도전해보라는 것이죠. 어려움은 극복하면 된다고요. 실제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확실히 믿습니다. 누구나 열정이나 꿈이 있다면, 그것에 도전해야 한다고 말입니다(I’m a firm believer that if you have a passion or a dream, you have to chase 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