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한인의 추수감사절과 블랙프라이데이 '변화' [황덕준의 크로스오버]  

2025년 블랙프라이데이를 맞아 쇼핑객들로 북적이고 있는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팜스프링스 아웃렛./LA=황덕준 언론인

[더팩트 | LA=황덕준 재미 언론인] 해외에서 동포살이를 하다보면 추석이나 설날 같은 고국의 큰 명절 때 다양한 생각을 갖게 된다. 말 그대로 '남의 집 잔치 엿보 듯' 무심한 척 부러워하게 마련이다.

미국에서 추수감사절(27일·매년 11월 네번째 목요일)이라는 연중 최대의 휴일(홀리데이)을 맞으면 한국 명절에 대한 아쉬움을 덜어보려 한껏 요란스럽게 법석을 떨어보기도 한다. 이민 초창기엔 이집 저집 미국 땅을 먼저 밟은 지인들의 초대를 받아 난생 처음 칠면조 구이에 으깬 감자, 크랜베리잼을 발라 먹어보기도 했다. 아무래도 입맛에 맞지 않는 퍽퍽한 칠면조 고기가 내키지 않게 되자 아예 한국식 통닭구이를 주문해 치맥파티로 바꾸며 즐거워한 적도 많았다.

그도 저도 심드렁해지면 남의 집 가서 눈치보는 추수감사절 파티 대신 차를 몰고 집이 있는 로스앤젤레스(LA)에서 그리 머지 않은 샌디에이고나 팜스프링스, 라스베이거스 등지로 1박 2일이나 2박3일 짜리 단거리 여행을 떠나 연휴를 보내곤 했다. 그때부터 명절은 사라졌고 단촐한 가족여행이 그 자리를 대체하는 통과의례가 됐다.

어느덧 하나 뿐인 딸 자식이 부모와 함께하는 여행이라면 손사래를 치는 성년이 돼버리자 작은 가족의 연중행사는 다 사라졌다. 다만 쇼핑 좋아하는 아내 덕분에 블랙프라이데이라는 무시무시한 별명이 붙은 추수감사절 이튿날의 '수행기사' 노릇이 주어졌다. 영업시간이 앞당겨져 새벽 6시에 문을 연다는 아웃렛에 가야한다고해 초승달을 보며 운전했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추수감사절이 끝나는 목요일 자정부터 오픈한다는 미친 마케팅 탓에 담요와 뜨거운 커피를 들려 백화점 앞에 내려주고 도망치듯 혼자 집으로 왔던 적도 있다.

올해도 추수감사절은 온가족이 함께 둘러앉아 맛난 음식을 나누는 파티나 명절은 아니었다. 집안에서 떡라면 끓여먹으며 화사와 박정민의 청룡영화제 공연 짤을 돌려보고 밀린 드라마 따라잡기로 여느 휴일과 다름없이 시간을 때운 끝에 '대망의 블랙프라이데이' 날이 밝자 아내로부터 임무가 하달됐다. "조금 멀지만 팜스프링스 아웃렛으로 가자!"

궁시렁대고 반항하다가 라면 냄비조차 구경도 못할 바에야 순순히 응해주는 게 백번 천번 낫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했던가. 아직까지는 운전하기를 좋아하니 말이다.

예상대로 캘리포니아에서 빅5 쇼핑몰 중 하나라는 팜스프링스 카바존 아웃렛까지 가는 길은 차량의 뒷범퍼만 쳐다보고 스멀스멀 기어가야 하는 꼬꼬무(꼬리에 꼬리를 무는) 행로였다. 1시간 반이면 충분한 90마일(약 145km)거리를 2시간 넘게 써야 했고, 도착해서도 주차 공간을 찾기까지 꼬박 30분 이상 걸렸다. 불경기라 예전보다 헐렁하겠지 싶었으나 악착같이 돈 쓰겠다고 몰려든 사람이 이렇게 많나 싶을 정도였다.

딜로이트 조사에 따르면 LA지역 소비자들은 지난해 대비 연말 연휴 기간 지출을 14% 줄일 계획인 것으로 나타났다고 했는데 어찌된 셈일까. 노동통계국은 LA의 소비자 물가 상승률이 전년 동기 대비 9월 기준 3.5%로, 전국 평균 3%를 상회했다고 했다. 물가 상승으로 인해 쇼핑객 10명 중 6명은 이번 연말 시즌 선물 대신 기프트 카드를 선택할 계획이라고 답하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블랙프라이데이의 소비 현장은 역설적인 장면을 보여주었다. 지갑은 얄팍해졌지만 쇼핑하는 발걸음은 분주한 소비자들의 모습은 무엇을 의미할까라는 궁금증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추수감사절 주말에 사상 최대 규모의 미국인들이 세일 쇼핑에 나설 것이라던 미국의 전국소매협회(NRF)의 전망이 맞았을까.

인플레이션을 예상한 소비자들이 가격이 나중에 오를까 봐 지금 당장 지출을 하는 경우가 있다는 경제학자들의 지적은 앞서 말한 '블랙프라이데이의 패러독스'에 단서가 될 듯하다. 돈을 보다 알뜰하게 쓰기 위해 추수감사절 다음날의 대규모 할인 쇼핑에 나섰다는 얘기다.

하지만 미국 소비자의 거의 90%가 AI를 통해 원하는 제품을 찾아 가격을 비교했다는 조사가 있고보면 또 고개가 갸우뚱거려진다. AI까지 동원한 소비자의 행태로 보면 굳이 이른 아침부터 오프라인 쇼핑몰에 몰려 장사진에 끼어들면서까지 발품을 팔겠는가 싶으니 말이다. 그냥 집안에서 컴퓨터나 스마트폰앱으로 쇼핑에 나서서 이른바 '사이버 먼데이'의 흐름에 가세하는 게 맞지 않을까.

이쯤에서 블랙프라이데이는 단지 할인쇼핑의 날이 아닌 다른 무엇이 있을 것이라는 합리적인 추측이 가능해진다. 대가족과 친지들이 한 테이블에 모여 먹고 마시는 파티는 시들해지고 '오픈런'을 위해 남편과 아들,딸을 동원해 상가 매장 앞에 줄서기하는 가족간의 또다른 연대의식의 발현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가족의 형태가 소규모, 핵 단위로 변하고, 함께 보내는 방식이 다시 짜여지면서, 블랙프라이데이는 자연스럽게 가족이 함께 겪는 통과의례 같은 연례행사로 바뀐 것이라는 얘기다. 물건을 고르고 붐비는 매장에 들어가기 위해 순서를 기다리는 일은 단순한 구매활동이 아니라, 가족이라는 작은 공동체가 한 해의 마지막을 어떻게 통과해가는지 보여주는 작은 의식이 되어가고 있다.

그러니 올해의 블랙프라이데이가 던지는 메시지는 간단하지 않다. 경제 데이타는 지출이 축소할 것임을 예고하고, 사회는 핵가족화의 증거를 내놓으니 라이프스타일은 여기에 새로운 현상을 연출해낸 것이다. 명절의 전통이 사라져갈 때 그 빈자리를 다른 행위가 대체하는 방식이야말로 지금의 블랙프라이데이가 가진 가장 흥미로운 단면이 아닐 수 없다.

미국 가족들은 더 이상 식탁 위에 맛 없는 칠면조 요리를 올려놓지 않는다. 대신 쇼핑몰의 긴 줄에서, 할인된 가격표를 함께 들여다본다. 가족이라는 이름의 연대감은 그같은 일련의 소비행동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100달러가 넘어 침만 삼켰던 운동화를 반값에 득템하도록 허락한 아내로부터 새삼 감사와 애정까지 느낀 하루였으니 더 무얼 말하겠는가.

djktow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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