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의 여름에도 '평양냉면'이 처음 찾아왔다 [황덕준의 크로스오버]

한인동포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미국 LA에 2025년 6월부터 평양냉면이 처음 등장해 슴슴한 맛을 즐기고 싶던 동포들의 입맛을 달래고 있다./뉴시스
한인동포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미국 LA에 2025년 6월부터 평양냉면이 처음 등장해 슴슴한 맛을 즐기고 싶던 동포들의 입맛을 달래고 있다./뉴시스

[더팩트 | LA=황덕준 언론인] 해외에 장기간 머무르거나 이민생활을 할 때 힘든 것 중 한 가지는 음식에서 비롯되게 마련이다. 고국에서 삼시세끼 일상적으로 섭취하던 먹거리야 요즘엔 세계 어딜 가도 찾기 어렵지 않다. 하지만 취향에 따른 음식이랄까, 이른바 '별식'이 당길 때는 그야말로 참기 힘든 고역이 된다.

나라 밖에서 한국인이 가장 많이 모여 산다는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 살면 그나마 한국 음식 걱정은 안 해도 된다. 가끔 SNS에 삼겹살 구이 파티나 횟집 풍경을 올리면 '미국에서 그런 것도 먹느냐'는 시대착오적인 친구들의 놀라움이 전해지긴 하지만 대한민국 팔도음식이라면 없는 게 없는 곳이 LA다.

이삽십년 전까지만해도 LA에서 찾기 힘든 한국의 먹거리들이 있었다. 이를 테면 홍어삼합이라든가 요즘은 먹지 않는 '사철탕'은 아예 없었다. 십수년 전 코리아타운에 홍어삼합을 메뉴에 올린 식당이 생겨 소식 끊긴 옛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움에 일주일에 두어차례씩 들르곤 했다.

미국 LA에 평양냉면을 주 메뉴로 6월 문을 연 서관면옥./LA=황덕준 언론인
미국 LA에 평양냉면을 주 메뉴로 6월 문을 연 서관면옥./LA=황덕준 언론인

요즘엔 냉동 홍어가 한국에서 수입돼 한인마트에서 상시 팔릴 만큼 흔해졌다. '사철탕'은 끊은 지 오래됐지만 예전엔 무더위가 견디기 힘들면 은근히 생각나곤 했다. 그럴 때면 흑염소탕 전문집을 찾아가 한국의 허다한 '싸릿골'이나 '○○나무집'에서 즐기던 맛을 대신 달랬다.

LA를 비롯한 미국의 어지간한 지역에서는 K푸드의 유행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식 먹거리 때문에 갈증을 느낄 일은 이제 없다고 봐야한다.딱 한가지, LA에도 없던 것은 평양냉면이었다. 홍어삼합이나 민물장어구이도 먹을 수 있게 된 LA에서 의외로 존재 자체가 제로였던 음식이 '평냉'이다.

'우래옥'이라는 간판을 단 식당도 있었고, 탈북귀순자가 차린 '모란각'도 있었지만 오래 전에 사라졌다. 게다가 그런 곳에서 팔던 냉면은 '평냉'의 흉내도 안낸 그냥 차가운 국수였을 뿐이었다. 한국을 방문하면 짐을 풀자마자 달려간 곳이 '필동면옥'이거나 '을지면옥'이었을 만큼 나름 '평냉부심'을 가진 터에 사시사철이 여름 기온인 LA에서 평냉없이 살아온 삼십년은 참으로 인고의 세월이었다.

올해도 기온이 올라가던 지난 5월 말 평냉이 몹시 당겨 서울행 비행기표를 알아볼까 싶을 정도였다. 그 간절함에 누군가 응답했을까. 6월부터 느닷없이 LA에 평냉전문점이 한 곳, 평냉을 메뉴에 심어넣은 곳이 또 두 곳 생겼다. 갑자기 세 곳에서 평냉을 판다니 어리둥절할 지경이다.

LA 한인동포들의 입맛을 달래주고 있는 평양냉면 식당 가빈./LA=황덕준 언론인

평냉전문점을 내건 곳은 서울 교대에 본점이 있는 '서관면옥'이고, 다른 두곳은 기존의 고기구이 위주 메뉴에 평양냉면을 끼워넣었다. 세 곳 모두 서울행 비행기를 타지 않아도 될 만큼 평냉 사촌쯤은 됨직한 맛이다. 지난 2018년 4월 남북정상회담 당시 옥류관 평양냉면이 등장하면서 한국에서도 새삼 평냉열풍이 불었다.

평냉 전문으로 입소문 나 있던 곳들마다 대기손님으로 장사진을 이룬 보도사진을 보고 LA의 한식당 업주들도 들썩였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평냉 특유의 슴슴한 국물 맛이 동포사회에서 통할 것같지 않다는 냉정한 현실 판단으로 몇몇 유명 평냉전문 브랜드를 가져오려던 시도가 무산된 걸로 안다.

그로부터 7년여가 지나서 다시 평냉전문점이 생길 정도라면 한인동포들도 이젠 밍밍하고 심심한 육수에 적응했다는 걸까. 한국의 온라인 식당 예약 플랫폼 '캐치테이블'이 5월 19일부터 6월 15일까지 4주간 캐치테이블 내 검색 및 방문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평양냉면 관련 키워드 검색량 중 20~30대 비율이 84%에 달했다고 ‘조선경제’가 전했다.

MZ세대를 비롯한 젊은 층의 맛집 순례 목록에 평냉이 포함됐다는 몇년 전 트렌드 기사를 보고 고개를 갸우뚱했는데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밋밋한 평냉에 도전(?)하는 한국 젊은 층의 호기심 충만한 정서가 LA이민사회에도 전파된 것인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SNS를 통해 평냉에 대한 궁금증이 커졌을 가능성이 있다.

유학생이나 방문객 등으로 한국과 교류가 잦아지다보니 찾는 이도 늘어나 자연스레 평냉이 식당 메뉴로 자리잡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평양냉면은 지난 2022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음식이다. 그만큼 당당하게 내세울 만한 별식이 2025년에야 LA에 입성했다는 사실은 만시지탄이지만 반가움 또한 못지 않게 크다.

이제 여기저기서 '평냉은 식초나 겨자를 넣지 말고 먹어라'느니 '평냉의 면은 가위로 자르면 안된다'느니 하며 전문가연하는 사람들의 온갖 시시비비가 난무할 것이다. 그 또한 LA 이민사회에 없던 풍경이니 그리 싫어할 이유는 없을 게다. 나아가 코리아타운을 드나드는 미국인 등 타인종이 평냉을 주문하면서 엄지척하는 날이 오면 K푸드의 성공은 정점에 이르리라 장담한다.

뭐 썪는 냄새같다며 코를 쥐어짜더니 이젠 자기네들끼리 알아서 청국장찌개를 시켜먹는 판이다. 평양냉면의 오묘하지만 단순한 맛에 빠져들기는 한결 수월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서울에서 꼭 가봐야할 평냉 맛집 10곳’ 같은 리스트가 뉴욕타임스나 CNN에 등장할 걸 상상하면 절로 ‘국뽕’에 젖어든다. 가자, 오늘 점심도 평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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