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다섯 살 딸이 ‘트럼프 선택’을 고민한 이유 [황덕준의 크로스오버]

6일(현지시각) 미 플로리다주 웨스트팜비치 컨벤션 센터에서 공화당 대선 후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선거 개표를 지켜보던 지지자들이 환호하고 있다./웨스트팜비치=AP.뉴시스

[더팩트 | 황덕준 재미 언론인] 서울 광화문에서 지인과 점심을 마치고 거리로 나섰을 때 한 언론사 건물의 뉴스전광판에 속보가 떴다. 커다란 붉은색 바탕의 띠에 '트럼프 미 대통령 당선'이라는 자막이 흘렀다. 곁에서 이를 쑤시던 지인은 유력 일간지의 편집국장이었고, 그는 순간 얼굴이 하얘졌다.

허둥지둥 휴대폰을 귀에 대면서 "나 먼저 갈게"라며 내달렸다. 신문사를 향해 뜀박질하는 게 틀림없었다. 마침 길거리 가판대에 그가 만든 석간신문이 내걸려 있다. 1면 제목은 이랬다. '힐러리 시대 열렸다' 8년 전 11월 6일(한국시간)의 일이었다.

그 편집국장은 힐러리 클린턴이 미국 최초의 여성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확신으로 결과 발표에 앞서 '속보 욕심'을 발휘, 미리 윤전기를 돌리도록 한 뒤 미국에서 방문한 나에게 한가롭게 점심을 샀던 것이다. 낭패도 그런 낭패가 있었을까. 트럼프라는 막 돼먹은 비주류 인물이 미국 정계에서 정 코스를 밟아온 엘리트 정치인 힐러리를 제치고 미국 대통령이 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당시 거의 없었던 게 사실이다.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을 나와 한국에서 오피니언 리더로 자리잡은 한 유력인사는 "미국이 어떤 나라인데 트럼프처럼 상스러운 사람이 대통령이 되겠는가"라며 힐러리 시대의 도래를 의심하지 말라고 단언했었다.

딸은 한국에서 유치원을 다니던 중 특파원 발령을 받은 아빠를 따라 6살에 미국땅을 밟았다. 2016년 트럼프와 힐러리의 대선 때 딸은 27살이나 됐는데도 미국 시민권을 따지 않은 채 영주권자로 있었다.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딸 아이는 "말도 안돼!"라고 여러 차례 소리 지르더니 다음날부터 시민권 신청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투표권을 가져야 겠다는 것이었다. 이민자들을 몹시 불편하게 만들고 동네 건달처럼 행동하는 트럼프 같은 사람이 대통령이 되는 걸 막으려면 유권자가 돼야한다고 뒤늦게 깨달았던 모양이다. 처음으로 투표권을 행사한 4년 전 조 바이든이 트럼프를 누르자 딸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환호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6일 플로리다주 웨스트팜비치에서 지지자들을 향해 승리를 선언하고 있다. /AP.뉴시스

올해 트럼프가 세 번째 대선에 나서고 중도하차한 바이든의 뒤를 이어 카멀라 해리스가 후보로 배턴 터치를 한 뒤 좀 지나 딸에게 물어봤다. "아시아계 아메리칸이고 민주당 후보인 해리스를 찍을 거지?" 놀랍게도 딸아이는 "글쎄…?"라며 선뜻 답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주변에 내 친구들 대부분이 트럼프를 찍을 거래." 자신도 좀 고민하고 있다면서 말이다. "왜? 넌 트럼프 싫어하잖아" "캐릭터는 맘에 안들어. 그래도 경제는 해리스보다 더 잘할 거 같애." 경제…!!! 그 경제가 어느덧 서른 다섯 나이가 된 딸아이에게 중요한 이슈가 된 모양이다.

MZ는 아니지만 밀레니엄 세대인 딸은 아닌 게 아니라 치솟은 물가와 외식비에 늘 투덜거려왔다. 한 달 수입은 달라진 게 없는데 달걀이나 우유, 베이컨 값이 두 배 이상 오르고, 한식당에서 칼국수 한그릇에 20달러씩 내야 한다고 혀를 내둘렀다. 주식투자도 조금 하고 있는 모양인데 특히 코인 가격이 바닥이라고 얼굴을 찌뿌리기 일쑤였다.

각종 여론조사와 유력 매체의 대선 예상은 한마디로 '박빙'에 예측불허였다. 해리스가 유리하다는 쪽은 인권과 기후변화 대응, 이민자 권익보호 등 민주당이 늘 내세우는 가치를 중시하는 사람들이었다. 트럼프가 이길 것이라는 쪽은 천정부지로 오른 집값과 인플레이션을 억누르길 바라는 사람들이었다.

거시적인 명분과 이념인가, 피부에 와닿는 민생인가의 싸움이었다. 뚜껑이 열렸다. 50대50의 접전은 개뿔~! 트럼프의 완승이었다. 여러가지 분석 가운데서도 전통적으로 민주당 지지세가 강한 이민자그룹인 라틴계 남성들이 해리스(44%)보다 트럼프(54%)를 10%포인트 차로 더 표를 줬다는 내용이 눈길을 끈다.

기실 트럼프는 불법 이민에 단호하게 대처하는 입장이지, 이민자들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정책을 펴는 것은 아니라는 '팩트'가 먹혀든 셈이다. 중남미 출신 이민 가정의 히스패닉계 합법 이민자들은 같은 지역에서 미국에 스며드는 불법이민자들이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을까 우려한다는 점이 트럼프에게 표를 던지게 했다는 해석이다.

트럼프에게 투표했다는 한인동포들의 말도 비슷했다. 불법체류 이민자들 때문에 주거문제가 생기고 도시의 일부가 슬럼화되는 데다 합법이민자들마저 미국사회에서 백안시 당하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이를 두고 이민자들의 이기적인 태도라고 비난하기도 하지만 불법이민을 강력하게 봉쇄하겠다는 트럼프의 직설적인 공약은 물에 물탄 듯한 민주당 정권에 비해 이민사회 구성원들에게 시원스럽게 받아들여진 모양이다.

8년 전 트럼프의 등장으로 분노의 감정까지 가졌던 딸아이가 이젠 차분하게 순응적이 된 현실을 받아들이며 가슴 한구석을 이렇게 쓸어내린다.

'트럼프 1기 4년 동안 핍박 받은 게 없잖아? 이미 겪어봤는데 더 나빠질 게 뭐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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