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 | 이광희 기자] 1950년 6월은 잔인했다. 그달 25일. 이 나라 국민들은 아무런 준비도 대책도 없는 상황에서 전쟁을 맞았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따로 없었다. 숱한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적을 맞으면서 혹 피난을 가면서 죽고 또 죽었다. 온 강토가 핏빛으로 물들었고 사체 썩는 냄새로 진동했다. 이 계곡 저 개울마다 널브러진 것이 주검이었다.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이때부터 계속된 전쟁은 3년을 끌었다. 결국 1953년 휴전협정을 맺을 때까지 이 나라는 온통 핏빛이었다. 그 한 가운데를 지나온 민중들은 참으로 끔찍한 역사 속에서 살아남았다.
1960년대 후반이었다. 할머니를 따라 고모 댁을 간 적이 있다. 고모 댁은 경북 칠곡군이었다. 그때만 해도 온 산이 벌거숭이였다. 나무는 한 그루도 없고 온 산이 구덩이 천지였다. 내가 살던 고향과는 풍광이 달랐다. 그러려니 했다. 마을 아이들과 이산 저산을 넘나들며 구덩이에서 뒹굴고 놀았다. 그런데 계곡이나 구덩이마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게 있었다. 소복하게 쌓인 뼛조각들이었다. 닭이나 토끼 같은 동물의 잔뼈 조각이 한 바가지씩 쌓여 있었다. 나는 '그곳 어른들이 토끼나 닭을 그리도 많이 잡아먹었을까' 어린 마음에 그리 생각했다. 의아했다. 그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훗날 그곳이 다부동 근처란 것과 6.25전쟁 가운데 가장 치열했던 전장이란 사실을 알았다. 숱하게 많았던 구덩이는 모두 포탄 자국이었다는 것도 뒤늦게 알았다. 어린 시절 보았던 그 많던 뼈들이 모두 그곳에서 산화한 사람들의 인골이었던 것이다. 숱하게 많은 사람들이 죽어간 그 자리를 뛰어다니고 뒹굴며 놀았던 게다. 돌이켜 생각해도 소름이 돋을 만큼 끔찍하다. 당시 이 땅에서 죽어간 사람이 500만 명에 달한다는 기록이 있다. 남북한 군인들은 물론 양민들까지 합하면 더 되지 덜 되지는 않을 것으로 추산된다.
이렇게 죽어간 수많은 사람 중에 우리기 기억해야 할 또 한 사람이 있다. 그는 '파란 눈의 한국인' 윌리엄 해밀턴 쇼다. 그는 선교사인 아버지 윌리엄 얼이 한국에서 활동했기에 1922년 6월 5일 평양에서 태어났다.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고등학교까지 졸업했다. 이어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웨즐리대를 졸업하고 미 해군에 입대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그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전해 전공을 세웠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1947년 해군 대위로 전역했다. 그제야 그토록 그리던 고향 한국으로 돌아왔다. 당시 한국은 미군정 치하에 있었다. 군도 제대로 창설되지 않았다. 육군을 대신 한 것이 국방수비대였다. 그는 한국에 군의 창설이 시급하다는 것을 일깨웠다. 더욱이 해군 장교 출신이었으므로 해군 창설을 역설했다. 이어 해군의 전신인 해양경비대 창설에 앞장섰다. 또 해군사관학교 교관으로 생도들을 육성했다. 그는 공부를 계속하겠다는 생각에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하버드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았다.
그러던 중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미국의 다른 학생들에겐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전쟁이 일어난 데 불과했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그는 아내와 두 아들을 처가에 맡기고 미 해군에 재입대했다. 당연히 부인과 처가에서는 강하게 만류했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설득했다. "내 조국에 전쟁이 났는데 어떻게 공부만 하고 있겠습니까. 공부는 전쟁이 끝난 뒤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을 한국인이라고 생각했다. 아울러 한국을 조국으로 여겼다. 한국에 있던 부모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지금 한국인들은 전쟁 속에서 자유를 지키려고 피 흘리고 있는데 제가 흔쾌히 도우러 가지 않고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린 후 선교사로 가려 한다면 그것은 제 양심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저는 지금 한국이 위기 상황에 놓여 있을 때 저의 지식과 경험을 갖고 한국을 도와야 한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그길로 짐가방을 챙겨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한국어가 유창했다. 어린 시절 평양에서 자라고 고등학교까지 나왔으니 한국인임이 분명했다. 눈만 파랄 뿐이었다. 그는 맥아더 장군의 최측근 보좌관 해군 정보장교로 임명됐다. 정보장교는 적정을 염탐하고 그곳 정보를 수집하는 역할을 한다. 인천상륙작전 직전에 한국에 밀파되어 괴뢰군들이 장악하고 있던 인천지역 정보를 수집했으리 추정된다. 결국 그의 정보력을 바탕으로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했고 대성공을 거두었다.
해밀턴 쇼 대위는 작전을 완수한 다음 미 해병대 5연대에 자원했다. 그러고는 서울 탈환에 직접 참전했다. 그토록 용감한 군인 쇼 대위에게 운명은 그곳까지였다. 1950년 9월 22일. 적진 후방을 정찰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는 척후병을 이끌고 적 치하에 있던 서울시 은평구 녹번동으로 숨어들었다. 하지만 그곳을 지키고 있던 괴뢰군 매복조에 발각되고 말았다. 그들은 중화기로 무장한 괴뢰군들과 교전을 벌였다. 치열한 전투가 한동안 계속됐다. 하지만 그는 안타깝게도 그곳에서 전사했다. 그때 쇼 대위는 29세였다. 참으로 꽃다운 나이였다. 그가 전사하고 유엔군은 일주일 뒤 서울을 탈환했다. 서울 수복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미인박명이란 말이 그에게도 적용되는 걸까. 훤칠한 키에 너무나 당당한 외모는 보는 이를 눈부시게 했다. 게다가 그는 외동아들이었다. 쇼에게 두 아들이 있어 대가 끊이지는 않았지만 부모의 아픔은 어떠했겠는가. 아버지 윌리엄 얼은 아들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미국 전역을 돌며 모금 운동을 펼쳤다. 그 헌금으로 대전시 중구 목동 옛 목원대학교에 교회를 세웠다. 그 교회는 현재 서구 도안동으로 이전한 이 대학 교회로 우뚝 서서 지금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교회 옆에는 윌리엄 해밀턴 쇼의 흉상이 학생들을 굽어보고 있다.
그는 평생 한국을 위해 헌신한 아버지 윌리엄 얼과 함께 서울 합정동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잠들어 있다.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는 그에게 각각 충무무공훈장, 은성무공훈장을 추서했다. 국가보훈처는 2015년 '9월의 6.25전쟁 영웅'으로 그를 선정했다. 그의 부인은 남편 잃은 아픔을 뒤로하고 서울로 돌아와 이화여대 교수와 세브란스병원 자원봉사자로 평생을 바쳤다.
파란 눈의 한국인. 그는 분명히 이 나라에서 태어나 이 나라를 위해 전사한 한국인이다. 한국을 조국으로 생각하며 전쟁이 발발하자 누구보다 먼저 달려와 전장에 나섰던 위대한 한국인이다.
74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우리는 그를 기억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알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그를 추념하는 이들이 있다. 그의 자식들이 이 나라에 와서 대를 이어 장학사업을 펼치는 등 선행으로 삶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을 안다.
오늘 우리가 이토록 넉넉한 삶을 사는 것도 모두 그들의 희생 덕분이다. 우리는 그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비록 6월에만 반추하는 한이 있어도 결코 망각해서는 안 된다. 그 점을 명심해야 우리에게 미래가 있다. 다시 한번 윌리엄 해밀턴 쇼와 그 가족에게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표한다. 6월의 아침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