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김병헌 기자] "모두의 싸움을 무력하게 만들었고, 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우리의 정당성마저 잃게 만들었다."(고민정 의원)
"당의 도덕성과 정체성이 뿌리째 흔들릴 수 있는 상황에 처해있다"(송갑석 의원).
19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본관 더불어민주당 대표 회의실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에서 나온 일부 지도부의 발언 강도는 심상치가 않았다. 2021년 당대표 선거 '돈 봉투 사건'의 책임자로 지목되고 있는 송영길 전 대표를 향해 민주당의 정당성 정체성 도덕성까지 거론하며 공개적으로 해명을 촉구한다.
19일은 바로 63년 전 시민민주주의를 완성시킨 4·19 혁명 기념일이다. 당시 두 달여 전 일어난 3.15부정선거는 학생과 시민의 거센 저항과 대규모 유혈사태를 불렀고 4·19 시민혁명으로 이어져 자유당 독재정권을 붕괴시키게 된다. 민주당으로서는 하필이면 이날 최고위원 회의가 발등에 불이 된 부정선거의 냄새를 풍길 수밖에 없는 2021 당대표 선거 돈 봉투 사건관련 송 전대표의 조기 귀국을 촉구하는 날이 된 셈이니 분위기는 더욱 무거웠으리라.
3.15 부정선거에서 한 갑자가 족히 지난 지금은 어떤가. 다른 사안도 비슷하지만 부정선거에 관한한 세상은 완전 상전벽해(桑田碧海)다. 선거공영제, 공직선거법, 정당법, 정치자금법 등 거론하기 숨가쁠 정도로 촘촘하게 짜여 부정선거는 발붙일 틈새는 없어 보인다. 금권선거를 용납하지 않을 만큼 국민 의식도 높다.
2008년 한나라당 7·3 전당대회를 앞두고 30대 남성이 당시 고승덕 의원실을 찾아와 300만원이 든 노란색 돈 봉투를 건넨다. 남성이 들고있는 쇼핑백 크기 가방 안에는 노란색 봉투들이 잔뜩 있었다고 한다. 돈 봉투 안에는 당대표 경선에 출마한 박희태 전 국회의장의 명함이 있었다. 고 의원은 돈봉투를 다시 돌려줬지만 이후 자신의 칼럼에 무심코 이를 거론한다.
놀란 한나라당은 검찰에 수사 의뢰했고 2012년 6월 서울중앙지법 재판부는 4년 전 이 사건의 당사자인 박희태 당시 국회의장에게 징역 8개월에 집행유에 2년을 선고한다. 재판부는 "이 사건의 범행은 대의제 민주주의와 정당제 민주주의 근간을 흔들 수 있는 것으로 큰 죄의식 없이 법을 무시하고 돈으로 선거의 투명성과 공정성을 침해해온 관행에 경종을 울릴 필요가 있다"고 밝힌다.
그로부터 10년 뒤인 2021년 민주당 전당대회 돈 봉투 살포 의혹은 그래서 더욱 충격적이다. 당대표 후보로 나선 송영길 전 대표 측 인사들이 돈을 조달하고 봉투에 넣어 전달한 정황은 이미 통화 녹취에서 생생히 드러난 상태다. 죄의식도 없어 보인다. 10여 명의 현역 국회의원에게는 300만원씩, 투표권이 있는 대의원 등에게는 50만원씩 총 9400만원이 전달됐다는 게 검찰 수사 내용이다. 전당대회 결과 송 후보는 당대표가 됐고, 돈 봉투 드라마 주인공인 윤관석 의원은 당 사무총장, 이정근 씨는 사무부총장에 발탁됐다.
이재명 대표는 지난 17일 공식 사과했지만 그전으로 돌아가 되짚어보자. 민주당은 검찰의 수사를 "야당 탄압" "정치 보복" "국면전환용 기획수사"라고 비난한다. 이 대표의 대장동 백현동 등 '사법리스크'에 대한 검찰 수사 때와 대응 양태가 변하지 않았다. 파리에 머물고 있는 송 전 대표는 "측근들의 개인 일탈"이라고 '나는 모른다'식으로 치부했다. 친명계의 좌장 정성호은 "수천, 수억도 아니고 고작 300만원을 갖고 그러느냐"는 의원들도 있다고 했다. 18일에는 한 라디오에 출연해 "부끄럽고 죄송하다"면서도 "전체적으로 큰 금액이라고 생각하지만 실무자들의 차비, 기름값, 식대 정도 수준"이라고 말한다. 물론 19일 사과했지만 그 정도면 괜찮다는 건가.
전당대회 후보를 돕는 국회의원에게 300만원은 부담 없이 받을 수 있는 성의 표시로 들린다. 물론 돈봉투를 받은 것으로 알려진 민주당 의원들도 300만원을 뇌물이라기보다 활동비나 격려금 정도로 무심코 받았을 수 있다. 10년 전 한나라당 사건 때보다 돈의 가치가 떨어져 그런건가. 지금도 절대 ‘고작 300만원’은 아니다. 패가망신의 갈림길이 될 수 있다. 송영길 전 대표의 조기 귀국과 해명으로 2021년 전당대회 돈봉투 의혹에 관한 급한 불을 끄려 했던 민주당의 수습책이 삐걱거린다. 송 전 대표가 조기 귀국 대신 자신이 체류 중인 프랑스 파리에서 22일께 기자회견을 하겠다는 뜻을 밝혀 19일 당 지도부는 17일 이재명 대표에 이어 다시 조기귀국을 요청한다.
송 전 대표의 조기 귀국 여부도 문제지만 이 재명 대표와 송 전 대표의 긴밀한 관계성이 부각되는 대목도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이재명 대표가 발빠르게 사과와 검찰수사를 요청한 부분도 관련이 있는 것 같다. 2021년 전당대회에서 친이재명계 의원들의 지지로 송 전 대표가 당선되고, 이후 송 전 대표는 이 재명 대표에게 자신의 지역구를 물려주는 등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다. 국민의힘은 ‘전·현직 대표 리스크’로 규정하고 공세를 퍼붓고 있다. 이재명 대표의 입장에서는 현재 수사 중이거나 기소된 ‘사법리스크’에다 새로운 리스크를 더 얹은 게 되는 셈이다. 자칫 기존의 '사법리스크의 한줄기로 흐를 가능성도 없지 않다. 물론 민주당은 친명계의 전당대회 개입설을 강력하게 부인한다. 그러나 송 전 대표가 이 대표의 직접적인 요청에도 귀국을 미룰 경우 이 같은 의혹이 설득력을 얻을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춘추시대(春秋時代) 좌구명(左丘明)의 저서인 ‘춘추좌시전(春秋左氏傳)’과 '국어주어(國語周語)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빈맹(賓孟)이라는 사람의 얘기다. 어느 집 마당에 있던 멋진 수탉이 제 부리로 꼬리 깃털을 물어뜯는 것을 보았다. 연유를 물으니 시종은 "웅계자단기미 탄기희야(雄鷄自斷其尾 憚其犧也)"라고 했단다. 스스로 꽁지를 자르는 건 자신이 제물로 쓰일 것을 겁내서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꼬리 자르기'다. 웅계단미(雄鷄斷尾)라는 성어로 전해온다. 이 대표가 국민의힘의 주장과는 달리 친명계의 애기가 맞다고 해도 국민의 눈높이에서는 '꼬리자르기' 의혹은 있을 수밖에 없다. 본격적인 검찰 수사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체 진상규명 조사를 보류한 당 지도부 결정도 아쉽다는 애기가 비명계 중심으로 나오고 있다. 총선을 앞두고 대형 악재인 만큼 수사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임시 출당 조치나 자체 조사 등 단호하고 선제적인 조치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대표에 대한 체포동의안은 넘어오는 대로 부결 가능성이 높은데 만약 ‘돈 봉투 의혹’ 전달자로 지목된 윤관석, 이성만 의원 등에 대한 체포동의안까지 국회로 넘어오면 지도부로서는 엄청난 딜레마이다. 이 대표 1차 체포동의안 때 당당하게 법원에 출두해서 실질심사를 받는 것이 나은 선택이었던것 같다는 얘기도 민주당 일각에서 흘러 나온다. 최근 민주당은 총선을 앞두고 지지율이 국민의힘을 10%가량 앞지르는 등 분위기가 좋은데 ‘찬물’이 계속 뿌려진다.
원인 제공자는 누굴까? 윤석열정부? 국민의힘? 검찰? 모두 아닌 듯하다. 그렇다면 내부에 있을 법한데 찾아내 개선하고 혁신하려는 의도도 없어 보인다. 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