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광주=박호재 기자] 마음이 힘들 때 자주 가는 곳이 어디냐는 질문에 교회나 절을 찾는다고 답하는 사람들이 많다. 다수의 사람들이 종교를 심리적 의지처로 삼고 있다는 얘기다. 정치의 영역에서도 이런 현상들이 존재하는 듯싶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지율이 떨어지는 등 정치적 난제에 휩싸일 때마다 TK 심장이라 일컬어지는 대구의 서문시장을 찾는다. 대선 유세기간 동안 대구만 4차례 방문했으며, 대선 하루 전날에도 대구에서 마지막 집중유세를 했다.
대통령이 된 이후에는 좀 달라지리라 여겼지만, 윤 대통령과 배우자인 김건희 여사의 대구 사랑은 이어지고 있다. 누가 봐도 편파적이라 느낄 만큼 벌써 여러 차례 서문시장을 찾았다. 또한 그때마다 정권을 향한 여론의 악화가 주요 동기일 때가 많았다. 이 정도면 대구 서문시장은 윤 대통령의 정치적 성지와 같은 곳이 됐다.
왜일까? 대통령의 국정운영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편중을 개의치 않는 윤 대통령의 상식 밖 행보를 보건데, 이는 통치전략 차원이기보다는 윤 대통령 개인의 특성 때문이라는 분석이 오히려 쉽게 가슴에 와 닿는다.
취임 이후 조각과 조직운영 방식을 보면 윤 대통령은 ‘잘한다’는 얘기를 들어야 고무되고 ‘싫은 소리’를 귀에 담지 않는 스타일로 여겨진다.
이와 관련 광주 출신의 원로 정치인으로 대선 당시 윤 캠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한 분이 사석에서 했던 말이 새삼 떠오른다. 대선 승리 후 정부 고위직을 제안 받았지만 선거 기간 동안 윤 대통령의 그런 성향을 일찌감치 발견했기에 자리를 고사했다는 것이다. 그분은 그 후 정부 요직은 아니지만 대통령의 입김에서 자유로운 비교적 편해 보이는 자리 한 곳을 차지했다.
이같은 관점에서 볼 때, 윤 대통령의 잦은 대구 방문은 ‘박수쳐주는 곳’을 찾아 정치 에너지를 재충전하기 위한 행보일 가능성이 짙다. 그러나 문제는 타 지역의 시각이다.
국민의힘 김종인 전 비대위원장이 지난 2020년 8월 광주 국립5·18 민주묘역을 참배하며 무릎을 꿇은 뜻밖의 장면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이 사건은 국민의힘의 ‘광주 끌어안기’, 이른바 ‘서진정책’의 본격화를 알렸다. 김 전 위원장은 이후에도 세 차례 더 광주를 방문했다.
이준석 전 대표도 이에 힘을 실었다. 이 전 대표는 2022년 새해 첫날 광주 무등산에 올라 대선에서 호남 득표율 20% 이상을 달성하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이날 산 정상에서 '호남의 힘으로 정권교체'라는 글귀가 적힌 작은 플래카드를 펼쳐 보이기도 했다.
김종인·이준석 체제에서 본격화된 국민의힘 서진정책은 2년 후 큰 성과를 이뤄냈던 것 또한 사실이다. 윤대통령 대선 후보 당시 호남 지지율은 25%~29%대까지 치솟으며 역대 우파 후보들 중 최고치를 기록했다. 지난해 6월 지방선거에서도 27년 만에 국민의힘 후보가 정당투표 14.1%로 광주 광역시의회 비례대표 의원에 당선됐다. 호남 제2당이라는 힘겨운 고지를 탈환한 것이다.
그러나 국민의힘 서진정책은 그곳에서 발길을 멈췄다. 아니 오히려 퇴행을 시작했다. 5·18기념식에서 유족들의 손을 잡고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던 윤 대통령 행보와도 배치되는 김재원 최고위원의 5·18헌법전문 불허 언급 등 실언이 이어지며 서진정책은 용도폐기가 됐다싶을 정도로 망가졌다.
지금 상황에서 국민의힘 서진정책은 전남 순천에 머물고 있는 이준석 전 대표의 언급을 통해 간헐적으로 거론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전 대표 자신이 당에서 배척을 당하고 있는 처지이기에 그 메아리는 공허하다.
정권 재창출을 기대하는 한 국민의힘은 서진정책을 팽개칠 수는 없다. 유한한 임기의 윤 대통령은 또 몰라도 당의 입장에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사안이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에서 서진정책 되살리기는 무너진 집을 다시 세우는 난공불락의 과제가 됐다. 조변석개함으로써, 신뢰라는 토대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당 수뇌부의 서진정책 망가뜨리기로 당의 소중한 희토류 같은 호남의 국민의힘 지지자들이 다시 절망의 늪에 빠져들고 있다는 점이다.
forthetrue@tf.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