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김병헌 기자] 피지올로구스는 중세기에 출간된 기독교적 색채가 짙은 동물도감 같은 책이다. 여기 솔개에 대한 설명도 있는데 생물학적 설명이라기보다는 교훈적 우화 같은 느낌이다. 솔개는 70살까지 살 수 있다고 한다. 40살이 되면 털이 너무 많아져 날개는 무거워지고, 부리와 발톱은 너무 길게 휘어 먹이를 먹거나 쥘 수 없게 된다. 이 때 솔개는 그대로 굶어죽거나 갱생의 길, 양자택일에 놓인다는 것이다.
40살의 솔개는 더 살기 위해 먼저 바위를 쪼아 부리를 깬다. 새로운 부리가 나오면 발톱을 모두 뽑아내고, 다시 발톱이 나면 깃털을 모두 뽑아낸다. 그렇게 가벼워진 날개와 새 부리, 발톱으로 남은 30년의 생을 더 살아간다는 설명이다. 실제 생물학적으로는 아니다. 솔개의 평균 수명은 24년이며 부리는 혈관과 신경이 밀집되어 부쉈다가는 극심한 고통과 출혈로 죽는다.
허무맹랑한 얘기가 중세기 동물도감에 수록되고 국내 대학수학능력시험의 언어 영역에도 나온 적이 있을 정도다. 국내에서도 한때 사실이라고 믿는 이도 적지 않을 정도로 인지도가 높은 이유는 뭘까? 전해주는 우화적 교훈은 가죽을 벗겨서 새롭게 한다는 혁신(革新)이나 쇄신(刷新) 의미다. 상상만 해도 ‘고통스럽고 어려운’ 과정이나 결과는 아름답다는 가르침이다.
6·1지방선거가 끝나자마자 승리한 국민의힘이나 참패한 더불어민주당은 승패를 떠나 양당 모두 시끄럽다. 거대 야당인 민주당은 대선후보였던 이재명 의원, 여당이 된 국민의힘은 이준석 대표가 논란의 중심에 있다. 혁신과 쇄신의 레토릭(수사)도 '기승전 혁신'이다.
국민의힘은 이준석 대표가 우크라이나 방문으로 당을 잠시 비운 사이 시작된 논란이 상호 당내 주도권 쟁탈 수준으로 비화했다. 우크라이나 방문이 적절했는지의 차원이 아닌 이 대표가 공천 등 정당개혁을 명분으로 발족한 '혁신위원회'가 갈등의 핵심이다.
이 대표의 성상납 의혹 관련 징계 건을 논의하는 당 윤리위원회가 24일께 개의를 앞둔 가운데 당내 신(新)주류로 부상하고 있는 ‘친윤(친윤석열)’의 5선 정진석 의원을 중심으로 이 대표를 겨냥해 공개 비판 등을 이어가면서 확전일로다. 이 대표도 "어차피 기차는 간다"는 등 날선 대응도 이미 수위를 넘어선 듯하다. 처음엔 양자 간의 SNS상, 이른바 ‘키보드 배틀’이던 것이 이제 당 전반의 '진짜 배틀'로 확산 중이다.
당내 주도권 이른바 당권 갈등이었음이 확연히 드러난다. 이 대표가 9일 귀국하면서 갈등은 더욱 본격화할 것 같다. 이 대표의 사생활 의혹에 대한 당 윤리위가 열리는 24일께에는 당이 혼란에 빠질 수도 있다.
공천 개혁은 일반적으로 주류 세력을 겨냥한다. 이 대표가 혁신위 발족을 선언한 것도 2024년 총선을 앞두고 주류가 되어가는 '친윤(친윤석열)' 의원들의 공천권 행사를 막기 위한 포석이라는 해석이 우세하다. 제대로된 혁신도 공천권과는 관계가 멀어 보인다. 사심이 가득한 자기정치와 밀접해 보인다.
‘친윤’도 이 대표의 '혁신위'를 '자기 정치'의 상징물로 보고 있다. 차기 대표의 권한인 총선 공천권에 영향을 미치려 한다는 얘기도 들린다. 내년 6월까지로 돼있는 이 대표의 임기 문제를 둘러싼 물밑 힘겨루기까지 맞물린다. 이게 혁신으로 가는 길인지 되묻고 싶다.
민주당 상황은 더욱 한심하다. ‘반명(반이재명)’ ‘친명(친이재명)’으로 갈려 "사욕과 선동으로 당을 사당화" "무슨 의도로 ‘네 탓 타령’을 하느냐" 등 거친 말싸움이 오간지는 꽤 됐다. "당은 다 죽었는데 (이재명은)혼자만 살아남았다"는 주장과 "이재명 죽이기이자 또 다른 계파주의"라는 주장은 애교 수준이다.
민주당은 분열이 심각해지자 지난 7일 6·1지방선거 참패 수습과 쇄신안 마련 등을 위한 혁신 비상대책위원회를 만들고 4선의 우상호 의원을 비대위원장으로 추대했다. 새 비대위도 '혁신'이 중심이다. 일단 보기에는... 국민의힘과는 전후가 다른 '혁신'인 셈이다. 당 대표 출마가 기정 사실인것처럼 여겨지는 이재명 의원이 문제인데 이를 원만하게 해결하려는 혁신적인 도구가 비대위인지는 모르겠다.
이 의원은 지금까지 공식적으로는 말이 없다. 그런데도 예정된 8월 전당대회를 앞두고 이 의원의 당대표 출마여부를 놓고 내전(內戰)의 확전 조짐까지 나타나고 있다. 민주당 지도부는 화급한 입장이다. 최악의 상황인 분당(分黨) 분당설에 대해서도 "말도 안되는 얘기"라고 잘라 말하지만 끊임없이 흘러나온다.
이재명 강성 지지층인 이른바 ‘개딸’(개혁의 딸) 중심의 신규 당원에게도 투표권을 주자는 친명 측과 "기존 룰대로 하자"는 반명 측이 강하게 충돌하고 있는 대목이 정말 예사롭지않다. 민주당의 '개혁'은 '나의 개혁'과 '남의 개혁'이 따로 있는지 의심스럽다. 지난 7일 민주당 의원총회에서도 전당대회 규칙과 관련해 격론이 벌어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새 비대위가 전당대회 룰(규칙)을 어떻게 설정할지가 최대변수다.
대선 당시 총괄선거대책본부장이었던 우상호 의원이 새 비대위원장으로 결정되자 이재명 의원의 전당대회 출마가 가시권에 들어섰다는 성급한 관측도 나돈다. 이 의원과 함께 대선을 치르며 동고동락했던 우 의원이 이 의원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사전 작업을 해줄 수 있다는 의구심이 제기될 수 있는 대목이다.
여기서 확언할 수 있는 것은 이대표나 이 의원 두 사람 모두 '혁신'과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다. 혁신의 허울을 뒤집어 쓴 당권 다툼,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차기 지도부가 2024년 총선 공천권을 쥐기 때문에 '갖고 싶어 하고 지키고 싶어하는 것'일 따름이다. 그런데 왜 '개혁 팔이'를 할까? 알 수가 없다. 국민들이 이 말에 쉽게 잘 속아왔던 전력이 있어서인지 모르겠다.
앞으로 총선 전까지 전국적 선거가 없어 지도부가 중도 사퇴할 이벤트도 사실상 없어보인다. 그 다음이 대선이니 성공하면 엄청 남는 장사라는 생각 때문인가. 그러니 지금 국민은 어디에 있는지, 대한민국이 어떤 상황인지 눈에 들어올 리 없다.
전국 단위 선거가 없는 향후 약 2년 동안 여당은 혁신을 통한 국정 성과로, 야당은 국정 견제와 자체 쇄신으로 국민 평가를 받아야 한다. 승리의 과실을 누가 더 가져갈 것인지 다툼에 여념이 없거나, 자신들을 지지해준 많은 국민들을 팽개쳐놓고 계파 대결만 노골화하거나 주도권을 잡을려는 건 개혁도 아니고 쇄신도 아니다. 사리사욕일 뿐이다. 국민들은 '이준석당' 또는 ‘윤핵관당’이든, ‘이재명당’ 이든 아니든 그게 중요하지 않다.
민주당 혁신은 먼저 열흘이상 공백 상태에 빠진 국회를 정상화하는 데에서 시작돼야 한다. 민주당이 법사위원장을 국민의힘에 넘기기로 한 지난해 7월 여야 합의를 번복했기 때문이다. '이재명당' 여부는 내부적인 문제다. 반면 국민의힘은 이 대표의 말처럼 2년도 남지 않은 총선 승리가 무엇보다 우선하진 않는다. 대선과 지선 연거푸 두차례 승리를 안겨준 국민이 더 중요하다.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 지 한 달이 된다. 그래서 지금은 '민생의 시간'이다.이보다 중요한 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