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헌의 체인지] '블랙아웃' 논란은 곁가지...직접 증거 찾아야

고 손정민 씨의 부친 손현 씨가 어버이날인 지난 8일 오후 반포한강공원 택시승강장 벤치 앞에 마련된 추모공간을 바라보고 있다.시민들은 준비한 꽃과 선물 등을 손 씨의 아버지에게 전달하며 위로의 말을 전했다./ 더팩트DB

고 손정민씨 사건 "경찰 원점에서 재수사하라"

[더팩트ㅣ김병헌 기자] 1981년 9월 18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의 인조석 야적장에서 미모의 여대생이 목을 졸린 시신으로 발견된다. 그녀는 해외여행을 꿈도 못 꾸던 당시 외국 연수를 보내 줄 정도로 부유한 집안의 딸로 부산 모 대학에 재학 중이었다.

대학 미전에 입선해 상을 받으려고 서울로 왔다가 변을 당했다. 용의자는 연수를 같이 간 학생 3명과 사업가 1명 등 4명이었으나 경찰은 수사를 진행하면서 연수 일행 중 한 명인 대학생 B 씨를 용의자로 지목했다. 그의 치흔이 그녀의 귀에 난 상처와 일치했다.

하지만 애무하다가 난 상처일 뿐이었다. B 씨는 강압 수사에 자백을 했지만 곧 무죄를 주장했고 검찰은 치흔이 직접적인 살인의 증거가 되지 않는다며 석방했다.

이번에는 검찰이 용의자로 C 씨를 체포한다. 피해자 친구의 제보로 체포된 용의자는 과거에 사귀었던 역시 부유한 집안의 대학생이었다. 검찰은 거짓말탐지기 조사에서 원하는 결과가 나왔고 증거를 13가지나 찾아냈다고 했지만 결국 다 정황증거였다. 검찰은 C 씨가 임의 자백을 했다며 구속기소한다. 하지만 재판 과정에서 B 씨는 허위 자백했다며 진술을 번복했고 대법원은 무죄 확정 판결을 했다.

이 사건은 부유층 자제, 미모의 여대생, 검경의 갈팡질팡 등의 사건 외형상 흐름만이 아닌 다른 측면에서도 국민적 관심을 받았다. 특히 C 씨의 대법원 무죄판결은 '확실한 물증만이 증거일 뿐'이라는 사실을 각인시켜준 최초의 판결이라는 면에서도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물증 확보의 골든타임인 초동수사의 중요성도 재확인시켜주면서 지금도 그 의미는 퇴색되지 않고 있다.

30년이 지난 지금은 대한민국이 한 엘리트 대학생의 한강변 죽음에 관심이 쏠려있다. 사건 발생 한 달이 훌쩍 넘었지만 경찰수사의 진전은 없다. 고 손정민씨 사건은 정민씨와 친구 A 씨 2명의 전도유망한 엘리트 대학생이 연관되면서 이슈를 모으고 있다.

친구사이였지만 한 사람은 고인이 됐고 또 다른 한 사람은 피해자가 사망으로 이어진 실종 직전까지 함께 있어 사건의 가장 중요한 핵심 참고인이 된 처지다. 현재로서는 경찰의 과학수사 기법과 물증 수집, 목격자 탐문 등의 노력에도 실체적 진실을 향한 걸음은 제자리다.

잠수사들이 서울 반포한강공원 택시 승강장 인근에서 고 손정민 씨 친구의 휴대폰을 수색하고 있다./임영무 기자

징민 씨의 친구이자 최종 목격자인 A 씨의 기억이 정민 씨가 사망에 이르게 된 것으로 추정되는 ‘실종’이라는 결정적 시간에서 멈추고 있는 탓도 크다. 기억 상실도 본인의 주장이다 보니 국민적 관심도와 맞물려 사건과 관련 온갖 추측과 유언비어가 난무한다. 경찰이 대응에 나설 정도다.

A 씨 측은 ‘블랙아웃’(Black-out)’때문에 기억이 없다고 주장한다. 과다한 음주의 가능성이 있어 정황상 개연성은 있다. 정민 씨가 사망에 이른 직접 증거를 찾지 못한 상황이라 ‘블랙아웃’은 사건의 새로운 쟁점이 됐다. ‘블랙아웃’의 법률적 의미에도 관심이 쏠린다. 법조계에선 ‘블랙아웃’ 인정 여부가 사건의 실체와 범죄 혐의를 입증하는 것에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설명한다.

이에 정민 씨 유가족은 실종 당일 오전 5시 12분쯤 A씨 가족이 한강공원에 도착한 모습이 찍힌 CCTV 영상을 공개했다. 영상에는 A 씨와 그의 아버지가 차에서 내려 성인 남성 허리 높이의 펜스(울타리)를 넘어 한강공원으로 향하는 모습이 담겼다. 손씨의 아버지는 "술 취한 기운이 없어 보인다"며 "A 씨가 사건 당시 블랙아웃이 아니었던 것 같다"는 취지의 의문을 제기했다.

친구 A 씨를 대리하는 양정근 원앤파트너스 변호사는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A 씨의 ‘블랙아웃’ 상태를 둘러싸고 커지는 의혹에 대해 반박 입장을 내놓았다. 양 변호사는 "(CCTV에 찍힌) 한 장면을 두고 취하지 않았다는 루머들이 도는데 다른 자료들을 보면 만취 상태를 알 수 있는 것들이 더 많다"며 "오전 6시 10분을 넘어 집에 돌아왔을 때 토하는 장면도 직접 확인했다"고 밝혔다.

사건의 쟁점이자 해결의 실마리가 될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이러한 ‘블랙아웃 논쟁’의 결과가 정민씨 사건을 둘러싼 혐의 입증을 좌우할 수 있다고 본다. 법원은 판례를 통해 ’블랙아웃‘을 "알코올이 임시 기억 저장소인 해마세포의 활동을 저하시켜 정보의 입력과 해석에 악영향을 주지만 뇌의 다른 부분은 정상적 활동을 하는 현상"으로 정의한다.

판례가 성립될 정도로 형사사건에서 블랙아웃은 혐의 입증에 중요한 변수가 된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상황이 다르다. 정민 씨 유가족 측은 A 씨의 ‘블랙아웃’에 대한 의혹만 제기했지 정민 씨의 사망과 직접적 연관이 있다는 식의 의심은 제기하진 않았다.

경찰 관계자들이 고 손정민 씨 친구 A 씨의 휴대전화를 찾는 수색작업을 벌이고 있다. A 씨의 휴대전화는 손 씨의 실종 당시 행적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로 지목되고 있다 ./더팩트DB

설령 A 씨의 블랙아웃 여부에 대한 진실이 가려지더라도 산 넘어 산이다. 사실이든 거짓이든 냉정하게 말하면 그건 그 자체로 남을 뿐이지 사건의 실체적 진실에 다가가는 데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진술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바꿀수 있기 때문이다. 30년 전 여대생 사건에서도 여러 차례 확인된다. 중요한 건 물적증거다.

그래서인지 정민씨 유가족은 경찰의 초동수사 미흡을 지적하고 보완수사를 요구하고 있다. 이에 경찰은 "유가족의 간절한 마음을 헤아려 실체적 진실을 밝히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밝혔다.

물론 경찰의 최근 수사 의지나 노력은 높이 살 만하다. 반면 초동수사는 물론이고 수사과정 설명에서 일부 내용 누락 등 아쉬운 점도 적지 않았다는 생각이다. 정민 씨 사건은 경찰 입장에서도 꼭 해결돼야 한다. 정민 씨 유족과 국민의 바람은 차치하더라도 굼뜬 수사과정에서 싹튼 경찰의 불신 해소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최근의 경찰 불신은 정부 불신, 나아가 정권 불신의 징조까지 보이고 있다.

추정이지만 수사의 지지부진은 정민 씨의 실종 신고 단계에서 경찰이 매일 들어오는 숱한 실종 신고 중 하나로 봤을 개연성에서 비롯됐다고 본다. 그러면 초둥수사는 미흡해질 수밖에 없다.

실종 사건이 사망 사건으로 바뀌는 순간에도 경찰은 국민적 관심이 엄청난 오늘의 상황까지 오리라고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어지는 격무의 후유증인 구태의연함과 안이함, 그리고 귀찮음이 한치도 없었다고 말하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대규모 수사인력이 투입되고 사건 발생 후 1달이 넘었지만 경찰의 수사의 진전은 없다. 정민 씨 유족과 국민들은 실체적 진실 규명을 간절히 원한다. 그래서 경찰은 국민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수준으로 이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꼭 밝혀야 한다.

시간의 흐름은 지날수록 실체적 진실 규명 가능성을 낮춘다. 수사 전문가는 아니지만 경찰은 처음으로 돌아가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수사과정을 다시 되집어 보는 게 맞다고 본다. 더 늦기전에 원점에서 재수사 하는 게 가장 정답에 가까워 보인다.

bienns@tf.co.kr

Copyright@더팩트(tf.co.kr)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