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옳은데 남이 그르다는 생각 버려야...
[더팩트ㅣ김병헌 기자] 여우는 높은 가지에 포도를 따 먹으려 몇 번을 시도하다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포기한다. 발걸음을 돌리며 혼잣말로 되뇐다. "저 포도는 시다."
못 따먹은 게 아니라 안 따 먹은 것이라는 자기합리화의 좋은 예로 등장하는 이솝우화의 ‘여우와 신포도’이야기다. 심리학적 자기방어기제 합리화는 비단 여우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살면서 합리화 방어기제가 없다면 우리 인생은 죄책감, 좌절, 비관, 우울 등으로 어두운 삶을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합리화도 정직하게 문제의 원인을 바라보지 않는다는 대목에서 위험하다. 매사를 합리화로 넘어가는 것은 자기 기만이 된다. 나아가 집단사고로까지 이어져 문제 해결을 못 하고 파멸로 갈 수도 있다.
생각의 차이는 있지만 최근 정부 여당의 움직임도 전반적으로 자기합리화 안에서 헤메고 있는 것 같아 심히 우려스럽다.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도가 최저치를 경신한 데 이어 여당 지지율도 급락한 게 그 원인인지 결과인지 모르지만 결국 같은 선상에 있다.
꾸준히 우위를 지켜온 차기 대선 구도가 열세로 돌아섰다. 4.7 서울시장 보궐선거마저도 야권의 후보 단일화 이후 열세가 더욱 굳어지는 형국이다. 2019년 ‘조국 사태’ 이후 코로나 정국 등으로 국정 지지도와 여당 지지율이 등락을 거듭했던 것과는 180도 다르다.
22일 공개된 각종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여권의 위기 상황은 한눈에 들어온다.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도는 역대 최저치다. 리얼미터가 YTN 의뢰로 지난 15~19일 전국 유권자 2510명을 상대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문 대통령의 국정수행에 대한 긍정평가는 지난주보다 3.6%포인트 하락한 34.1%로 나타났다.
부정평가는 4.8%포인트 상승한 62.2%. 긍정평가는 집권 이후 최저, 부정평가는 최고치다. 또 집권여당 지지율도 마찬가지다. 여당 지지율은 전주보다 2.0%포인트 하락한 28.1%로 이 정부 출범 이후 가장 낮았다.
국민의힘은 3.1%포인트 오른 35.5%를 기록, 두 정당의 지지율 격차는 7.4% 포인트로 오차범위(신뢰 수준 95%에 오차범위 ±2.0%포인트)를 벗어났다. 1년도 남지 않은 차기 대선 지형을 미리 살펴볼 수 있는 여론조사에서도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지지율이 급상승하면서 위기감은 높아졌다.
여당 주자인 이재명 경기지사와 이낙연 전 민주당 대표가 그동안 양강구도를 굳건하게 형성해왔지만 같은 날 한국사회여론연구소가 TBS 의뢰로 실시한 여론조사 공표 결과 윤 전총장의 선호도는 39.1%. 완전 독주다. 2·3위 주자인 이재명 지사(21.7%)와 이낙연 전 대표(11.9%)의 지지율 합한 것을 넘어선다. 같은 40%가 넘은 기관도 있다. 여권으로서는 충격적이다.
정치권에서는 그동안 위기 요인들이 누적되어 상승작용을 일으키고 있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조국 사태’를 계기로 직면한 도덕성 위기, 독선적 검찰개혁으로 야기된 검찰과의 갈등 및 피로감, 신현수 전 민정수석 파동에서 불거진 국정 난맥상에 부동산 정책 실패와 LH 사태가 촉발한 공정성의 위기에 대한 여권의 만성적 자기 합리화로 화를 키웠다. 통치능력 전반에 대한 전반적인 불신이다.
2016년 촛불 혁명은 권력층의 절차 위반과 습관화된 불공정으로 일어났다. 이후 들어선 정부도 이를 사실상 답습하면서도 우리는 아니라는 자기 합리화로 일관해온 탓이 위기를 불렀다는 게 정치 평론가들의 중론이다.
민심이반 현상은 4.7 재·보선을 통해 ‘정권 심판론’으로 표출되는 양상이다. 일각에서는 다수의 중도층과 일부 진보세력까지도 등을 돌렸다는 평가도 나온다. 한 청와대 관계자는 "보궐선거를 앞두고 정권심판론이 확산되는 걸 피부로 느낀다"면서" 부동산 민심이 악화되면서 백약이 무효인 상황"이라고 털어놨다.
여당은 재·보선에서 본격적인 정책 대결로 대응하겠다는 계획이다. 공식 선거운동 시작일인 25일을 반등의 기점으로 삼겠다는 각오다. 이달 중 LH 투기 의혹 사태에 대한 근원적인 대책을 마련할 방침이다. 하지만 국민들이 납득할 만한 가시적인 대책이 나오기는 힘들 것으로 보는 여론이 전망되면서 지지율 반등이 쉽지 않을거란 분석이 우세하다.
지난 19일 이해찬 전민주당 대표의 ‘거의 이긴 것 같다’는 발언 또한 자기합리화의 연장선이다. 여론조사에 위축이 된 지지층의 결집용 성격이라고 해도 국민을 기만한다는 말이 나올 수 있다. 이 전 대표의 발언이 야권 지지자들의 결집과 국민적 반감을 불러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23일 내린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에 대한 평가도 같은 맥락이다. 임 전비서실장은 "내가 아는 가장 청렴한 공직자"라며 "그의 열정까지 매장되지는 않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또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은 윤석열 전 검찰총장에 대해 "언론이 신비주의에 가깝게 키워준 면이 크다"고 말했다.이 대목도 자기합리화에 지나지 않는다.
맹자(孟子)의 이루상(離婁上)편에 반구저기(反求諸己)라는 말이 유래한다. 한마디로 ‘내탓이오’라는 뜻이다. 행하고 얻지 못하는 게 있거든 돌이켜 자신에게 원인을 찾고 반성하라(행유부득자 개반구저기/行有不得者 皆反求諸己)의 의미다.
나는 항상 옳은데 상대방이 그릇되니 그게 문제라는 생각은 화를 부른다. 여권이 이 지경에 이른 것도 같은 이유다. 물론 최근 역주행 중인 가수 나훈아씨의 ‘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라는 노래에 공감할 때도 적지 않을 것 같긴 하다. 매사가 ‘내 탓이 아니라 남 탓’도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책임지는 위치에 있는 여권은 항상 내 탓이 먼저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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