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 | 최정식 선임기자] 베이브 루스가 홈런왕으로 명성을 날리기 이전 뛰어난 투수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보스턴 레드삭스의 선발투수였던 루스는 1915년 18승 8패로 리그 최고 승률을 기록했고, 1916년에는 23승 12패에 평균자책점이 1.75로 1위였다. 1917년에는 24승 13패를 기록했다. 1918년과 1919년에는 등판수가 절반 이하로 줄었지만 각각 13승 7패, 9승 5패를 거뒀다.
왜 등판이 줄었을까? 투타 겸업을 했기 때문이다. 1918년 시즌 중 레드삭스의 중견수 해리 후퍼는 에드 배로우 감독에게 루스를 풀타임 외야수로 쓸 것을 건의했다. 루스가 타자로서도 대단한 실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배로우 감독은 루스가 날마다 팀의 전력이 될 수 있다는데 매력을 느꼈지만 투수로 쓰지 않기도 아까웠다. 결국 루스는 이 해에 투수로 20경기, 외야수로 59경기, 1루수로 13경기에 나섰다. 투수를 겸했기 때문에 타석이 적었지만 리그에서 가장 많은 11개의 홈런을 날렸다. 신이 난 배로우 감독은 다음 시즌 루스를 외야수로 111경기에 내보냈고 투수로는 17경기에만 기용했다. 루스의 홈런은 29개로 늘어났다.
루스는 뉴욕 양키스로 트레이드된 뒤 완전히 외야수로 전향했다. 루스가 계속 투수를 했을 경우 어떻게 됐을까? 위대한 투수로 메이저리그 역사에 이름을 남겼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레너드 코페트는 "당시 지명타자가 있었다면 나흘에 한번씩 마운드에 오르고 나머지 사흘은 지명타자로 타석에 들어설 수 있었을 것이고 투타 양쪽으로 명예의 전당에 들어갔을 것"이라고 했다.
루스의 투타 겸업은 자신의 의지라기보다는 그의 재능을 모두 살려 더 많은 승리를 거두기 위한 배로우 감독의 절충이었다. 그리고 이후의 타자 전업은 시대의 요구였다. 그가 레드삭스에서 투타 겸업을 한 1919년까지는 반발력이 약한 공을 사용한 '데드볼 시대'였다. 홈런과 득점이 적었고 투수들이 지배했던 피칭의 황금기였다. 그러나 루스가 양키스로 옮긴 1920년 반발력이 좋은 공이 도입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루스와 로저 혼스비 같은 강타자들이 홈런을 펑펑 날려대는 '라이브볼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루스는 1920년 54개,1921년에 59개의 홈런을 치며 야구 붐에 불을 지폈다.
일본프로야구 닛폰햄의 오타니 쇼헤이가 12일 라쿠텐전에서 5⅔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으며 시즌 첫 승을 올렸다. 투타 겸업을 하는 오타니는 부상에 시달렸다. 최근 타자로 맹활약하고 있는데 투수로는 이날이 세 번째 등판이었다. 이날 승리가 통산 40승째였는데 홈런도 47개를 기록 중이기 때문에 40승-40홈런을 달성했다. 노구치 아키라(49승 61홈런), 니시자와 미치오(60승 212홈런), 세키네 준조(65승 59홈런)에 이어 일본프로야구 사상 네 번째다.
오타니는 지난해 투수로는 21경기에 등판해 10승 4패에 평균자책점 1.86을 기록했고, 타자로는 104경기에 나서 타율 0.322에 22개의 홈런을 터뜨리며 팀의 우승을 이끌었다. 그같은 활약으로 퍼시픽리그 MVP를 차지했다. 포스트시즌에는 자신의 종전 기록을 넘어서는 시속 165km의 강속구를 던지기도 했다.
오타니는 올 시즌이 끝난 뒤 메이저리그 진출에 도전할 예정이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메이저리그 직행을 언급하며 일본 프로구단들에 자신을 지명하지 말라고 했다. 그런 그를 닛폰햄과 구리야마 히데키 감독이 설득했다. 오타니를 움직인 것은 투타 겸업을 지원하겠다는 약속이었다. 상식을 벗어난 '이도류(二刀流)'의 투타 겸업이 만화 같은 대성공을 거둔 원동력은 선수 자신의 강한 의지였던 것이다.
메이저리그의 루스처럼 일본프로야구를 대표하는 홈런왕 오 사다하루도 투수 출신이다. 1940~1950년대 '타격의 신'이라고 불리운 가와카미 데쓰하루는 5차례 타격왕에 올랐는데 그 가운데 2차례는 투타 겸업을 하면서 이룬 것이다. 운동능력이 뛰어나고 머리도 좋은 선수는 피칭이나 타격을 모두 잘할 수 있다. 국내에서도 고교까지 에이스와 4번타자를 겸한 선수가 적지 않았다. 대부분의 투수들은 많은 러닝 등 강도 높은 체력훈련을 소화해 허리와 하체가 야수들보다 강하다. 상대 투수의 심리를 읽는데도 유리한 점이 있다.
지난 11일 열린 2018 KBO 신인드래프트에서 서울고 강백호가 전체 1순위로 kt에 지명됐다. 노춘섭 kt 스카우트팀장은 지명선수 호명 때 '투수 겸 포수 강백호'라고 말했다. 투수와 타자 모두 기대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강백호는 올해 타자로 타율 0.422, 투수로 3승 1패에 평균자책점 2.43을 기록했다. 그가 화제가 된 것도 투타 모두 뛰어나기 때문이다.
kt는 강백호를 타자로 쓸 가능성이 높다. 그럴 경우 포지션은 포수가 아닌 외야수가 될 것이다. 김진욱 감독은 "투타 겸업을 하면 관심을 끌어 프로야구 흥행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지만 겸업을 하면서 양쪽 모두 좋은 성적을 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는 전체 1순위가 유력했지만 100% 확신할 정도는 아니었다. 투타 모두 미완의 유망주일 뿐이다. 오타니 같은 성공을 기대하는 것은 성급하다.
1982년 해태 김성한은 타자로 타율 0.305에 13홈런 69타점, 투수로 10승 5패 1세이브 평균자책점 2.88을 기록했다. 등판하지 않을 때는 3루수를 맡았다. 1985년 홈런왕에 오를 정도의 강타자였던 그가 투수로 나섰던 것은 팀 사정 때문이었다. 창단 후 첫 시즌 해태는 심한 선수난을 겪었고 특히 투수가 부족했다. 성공적인 투타 겸업이었지만 계속 그럴 수는 없었고 결국 타자의 길을 선택했다. 이후에도 86년까지 가끔 마운드에 오르며 5승을 더 보탰다.
현재의 프로야구는 김성한이 뛰었던 프로 초창기와 시스템이나 환경이 다르다. 투수와 타자들의 기술도 발전했다. 오타니는 예외적인 경우다. 그도 메이저리그에 진출한다면 투타 겸업을 못할 가능성이 크다. 내셔널리그 팀에서 선발 투수로 뛸 경우 등판일에만 타격 실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야구에서 투수의 비중이 워낙 큰 까닭에 구단들도 투타 모두 재능이 있는 선수를 투수로 뽑고, 선수들도 투수를 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투수로 스카우트돼 타자로 대성한 사례가 있기 때문에 예전 같지는 않다. 이승엽은 삼성에 투수로 입단했지만 고교 시절 다쳤던 팔꿈치 때문에 피칭에 애를 먹으면서 타자로 전향했다. 이대호도 롯데에 입단할 때 투수였지만 전지훈련에서 어깨를 다쳐 야수로 전향했다. 투타 모두 소질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선택의 계기도 있다. 이승엽은 투수로 스카우트됐고 전지훈련때가지도 선배투수 성준과 함께 방을 쓰며 공을 던지고 있었다. 그런데 1995년 시즌을 앞두고 간판타자 양준혁이 1루수가 자신이 없다며 외야수로 바꿔달라고 코칭스태프에 요청했다. 그가 떠난 1루에 자리잡은 선수가 신인이었던 이승엽이었다. 양준혁이 계속 1루를 지키고 있었다면 이승엽은 타자가 아닌 투수로 데뷔했을지도 모른다.
강백호의 경우도 팀의 상황, 특별한 계기, 프로에서의 적응 등에 따라 한쪽을 선택하게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느 쪽의 재능이 더 성공 가능성이 높느냐 하는 점이다. 강백호 자신은 타자 쪽에 더 마음을 두는 듯하다. kt와 강백호가 어떤 선택을 할지,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는 어떻게 나타날지 무척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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