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 | 최정식 선임기자] 스크루볼은 허벨뿐 아니라 다른 투수들에게도 선수 인생에서 반전의 계기가 됐다. 메이저리그 사상 최고의 왼손 투수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워렌 스판은 35세 때인 1956년 자신이 하향세에 놓여 있음을 느끼면서 스크루볼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는 6시즌을 더 20승 이상 거둘 수 있었다. 그는 21년의 선수 생활 동안 13시즌 20승 이상을 올렸는데 42세의 나이에 23승7패를 기록할 만큼 장수했다. 1965년부터 1967년까지 4승 19패에 그친 터그 맥그로도 스크루볼 투수로 변신한 뒤 1984년까지 현역 생활을 연장할 수 있었다. 그 중에서 허벨 이후 스크루볼로 가장 유명해진 투수는 페르난도 발렌수엘라였다.
1979년 가을. 76세의 허벨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임시 스카우트로 일하고 있었다. 애리조나주 메사 근처에서 살고 있었던 그는 어느 날 스코츠데일의 교육리그에서 한 젊은 투수가 자신의 전매특허였던 스크루볼을 던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흥미를 느끼고 직접 확인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 투수는 LA 다저스가 스카우트한 멕시코 출신 발렌수엘라였다. 발렌수엘라가 등판하던 날 허벨은 친구와 함께 경기장을 찾았다. 발렌수엘라가 스크루볼을 던지는 것을 본 허벨은 친구에게 말했다. "나 이후로는 최고야. 아주 자연스러워."
발렌수엘라는 다저스 스카우트 마이크 브리토가 발굴했다. 브리토는 멕시코 담당이었는데 밥 카스티요 등 몇몇 선수들을 스카우트했지만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 1978년 3월의 어느 날 그는 점찍어뒀던 유격수가 경기하는 것을 보러 멕시코 소도시 실라오로 갔다. 그런데 상대팀 투수가 그의 눈길을 붙잡았다. 왼손 투수 하나가 패스트볼과 커브로 타자들을 삼진으로 잡아냈다. 스트라이크존 구석구석을 찌르는 그의 투구를 보던 브리토는 생각했다. "우리가 찾던 투수잖아. 이건 완전히 멕시코판 샌디 코팩스야."
발렌수엘라와 계약한 다저스 단장 알 캄파니스는 그가 괜찮은 투수이긴 하지만 메이저리그 마운드에 서기에는 조금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주무기인 커브는 좋았지만, 패스트볼은 메이저리그에서 간신히 통할까 말까 하는 수준이었다. 뭔가 체인지업으로 쓸 공이 필요했다. 캄파니스는 스크루볼을 떠올렸다. 다저스에는 발렌수엘라 이전에도 스크루볼로 재미를 본 선수들이 있었다. 구원투수였던 짐 브루어와 마이크 마셜이었다.
캄파니스는 발렌수엘라를 메이저리그에서 통하는 투수로 만들기 위해 교육리그로 보냈고 스크루볼 선생으로 카스티요를 붙여줬다. 브리토가 스카우트했던 바로 그 카스티요였다. LA에서 태어났지만 멕시코계인 카스티요는 캔자스시티 로열스에서 내야수로 뛰다가 방출된 뒤 야구를 그만두고 새 인생을 찾기 위해 멕시코로 갔다가 스크루볼을 배웠다. 다저스는 그가 구단 사상 최초의 멕시코 출신 스타가 되기를 기대했으나 그는 성공하지 못했다. 대신 그가 스크루볼을 가르친 발렌수엘라가 그 자리에 올랐다.
발렌수엘라는 마이너리그 샌안토니오에서 1980년 시즌을 맞으면서 스크루볼을 기본적으로 체인지업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6월 중순부터 발렌수엘라가 스크루볼을 던지는 빈도가 늘어났다. 6승9패였던 발렌수엘라는 이후 7연승을 달리며 평균자책점 0.87을 기록했다. 62이닝을 던지면서 31개의 안타와 12개의 볼넷을 허용했다. 그런데 탈삼진이 무려 73개였다. 비정상적일 정도로 팔이 유연했던 그는 스크루볼을 주무기로 사용하면서도 팔에 별 무리를 느끼지 않았다.
마이너리그에서 1년을 보내고 발렌수엘라는 디비전 타이틀을 노리고 있던 다저스에 콜업됐다. 샌안토니오에서 35이닝 무실점을 기록했던 발렌수엘라는 메이저리그에 올라와서도 구원 투수로 나서며 17⅔이닝 동안 단 1점만을 내줬다. 발렌수엘라는 루키 시즌이었던 1981년 하나의 신드롬을 일으켰다. 휴스턴과의 개막전 완봉승을 시작으로 8연승. 7번 완투하면서 5번 완봉승을 거뒀다. 이 기간 동안 그의 평균자책점은 0.50에 불과했다.
홈은 물론 방문경기에서도 수많은 관중이 그의 피칭에 열광하는 '페르난도마니아'가 메이저리그를 휩쓸었다. 그해 그가 등판한 첫 10경기의 평균 관중은 4만 명이었다. 같은 기간 내셔널리그 전체 경기의 평균 관중은 2만5천 명. 한번은 다저스가 선발 투수 로테이션을 바꾼 적이 있었다. 발렌수엘라의 등판이 하루 앞당겨지게 되자 구단은 홈경기 입장권을 예매한 팬들에게 표를 바꿔줘야 했다.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이같은 열풍을 가져온 힘, 그것은 물론 스크루볼이었다.
스크루볼이 투수의 팔을 망가뜨린다는 인식은 허벨에 의해 정설로 굳어졌다. 허벨은 스크루볼을 지나치게 많이 던졌고, 공의 위력을 더하기 위해 극심한 손목 회전을 감수했다. 1930년대 후반이 되면서 그는 팔꿈치에 이상을 느끼기 시작했고 결국 뼛조각 제거 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 그는 스크루볼을 거의 던질 수 없게 됐고 평범한 투수로 전락했다. 허벨은 "반쪽 투수가 됐다."며 한탄했다. 허벨의 왼팔은 똑바로 섰을 때 손바닥이 앞을 향할 정도로 구부러졌고, 왼쪽 소매가 오른쪽보다 짧도록 양복을 지어입어야 했다.
허벨이 스크루볼로 명성을 얻으면서 그에게 배우려는 투수들이 생겼다. 1938년 자이언츠의 신예 왼손 투수 클리프 멜턴이 허벨에게 스크루볼 던지는 법을 배웠다. 멜턴은 1937년 메이저리그에 데뷔하면서 20승 투수가 됐지만 더 좋은 성적을 올리고 싶었던 것이다. 멜턴은 11승을 거두며 잘나갔지만 어느 날 스크루볼을 던지다가 심한 통증 때문에 마운드에서 내려와야 했다. 그는 그 시즌을 14승14패로 마쳤고 다시는 20승을 기록하지 못했다. 멜턴은 1942년 팔꿈치 뼛조각 수술을 받았고 1944년 은퇴했다. 허벨은 이후 아무에게도 스크루볼 던지는 법을 가르치지 않았다.
그러나 스크루볼이 부상을 야기한다는데 대해서는 반론도 적지 않았다. 스크루볼을 던지고도 팔에 이상이 생기지 않은 투수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몇 차례 의학적 연구에서도 스크루볼이 투수의 팔을 해친다는 증거는 찾을 수 없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1980년대에는 발렌수엘라 외에도 스크루볼로 명성을 얻은 투수들이 있었다. 푸에르토리코 출신으로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등에서 구원투수로 활약한 윌리 에르난데스는 1984년 사이 영 상과 MVP,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1988년, 메이저리그 사상 12번째 퍼펙트 게임의 대기록을 수립한 신시내티의 톰 브라우닝도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씩 스크루볼을 요긴하게 써먹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스크루볼 투수를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왜 그럴까? 시대가 변화화면서 야구의 양상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허벨이 올스타전에서 루스 등을 상대로 탈삼진 쇼를 펼쳤고 발렌수엘라는 데뷔 시즌 내셔널리그 탈삼진왕에 올랐지만 스크루볼이 삼진을 잡기 위한 공은 아니다. 싱커처럼 평범한 땅볼을 유도해 손쉽게 아웃카운트를 올리는데 더 적합하다. 허벨은 "스크루볼이 효과적인 것은 공의 변화가 아니라 스피드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는 완벽한 제구력을 바탕으로 스크루볼을 패스트볼, 커브와 절묘하게 섞어 던지면서 스피드 변화로 타자를 상대하는 기술을 예술적인 경지로 끌어올렸다. 기본적으로 체인지업의 성격이 강한 것이다. 그런데 서클 체인지업과 스플릿핑거 패스트볼, 컷 패스트볼 등 비슷한 효과를 볼 수 있는 여러가지 구종이 개발되면서 힘들게 스크루볼을 연마할 필요성이 적어졌다.
또 과거에는 다양한 작전을 통해 차곡차곡 점수를 쌓아가는 야구가 주류를 이뤘으나 이제는 장타로 승부를 보려는 타자들과 그런 타자들을 삼진으로 잡아내려는 투수들이 힘으로 맞붙는 시대가 됐다. 스크루볼의 퇴조를 불러온 요인 가운데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