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구의 역사] 2.라이브볼 시대-도전과 응전

[더팩트 | 최정식 선임기자]

2.라이브볼 시대

도전과 응전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투수들은 중대한 도전에 직면했다. 이제까지의 '죽은 공' 대신 '살아 있는 공'을 던져야 했고, 강력한 무기였던 스핏볼도 잃었다. 이에 반해 타자들은 종전보다 손잡이가 가늘어진 배트로 새로운 타격 기술을 익혀 투수들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투수들은 계속 바뀌는 규칙에 적응해야 했던 19세기의 선배들처럼, 생존을 위해 하루아침에 달라진 환경에 적응해야 했다.

1920년 메이저리그에서 사용하는 야구공이 바뀌었다. 반발력이 좋은 공을 쓰기로 한 것이다. 1910년에도 기존의 고무 심에 코르크를 더하는 공이 등장하면서 잠시 타자들이 득세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투수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반발력이 커진 공에 적응했고, 지나치게 공격에 유리하다는 지적에 따라 실을 느슨하게 감는 방법으로 다시 반발력을 죽였다.

이번에는 달랐다. 투수들이 적응하기에는 공의 반발력이 너무 커진 것이다. 내셔널리그와 아메리칸리그가 같은 공을 쓰도록 한 것은 1934년이 되어서였다. 그러나 이에 앞서 1920년 양 리그는 공을 만드는데 쓰는 실을 호주산으로 통일했다. 미국산보다 강한 호주산 실은 심을 더욱 단단히 감을 수 있었고 그에 따라 반발력도 커졌다.

야구공이 바뀐 것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데드볼'을 썼던 1919년과 '라이브볼'을 쓴 1921년의 통계를 비교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메이저리그 평균 타율은 .263에서 .291로 올라갔고, 평균 득점도 7.75에서 9.71로 늘어났다. 경기당 홈런도 두 배가 됐다.

반발력이 좋은 공이 도입된 바로 그해 야구의 양상을 바꿔놓은 중대한 사건이 벌어졌다. 1920년 8월 17일 뉴욕 양키스 투수 칼 메이스가 던진 공이 클리블랜드의 유격수 레이 채프먼의 왼쪽 관자놀이를 강타했다. 채프먼은 병원으로 실려갔고 결국 다음날 숨졌다.

채프먼의 사망은 그 이후 투수와 타자의 대결에 큰 영향을 미쳤다. 첫 번째는 빈볼(beanball)이다. 야구 규칙은 투수가 고의적으로 타자를 맞히려고 투구했을 때 투수는 물론 감독까지 퇴장시킬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한 타자의 사망이라는 비극으로 인해 스트라이크 존의 개념이 확립된 이후 투수들에게 당연시돼왔던 위협 투구가 불법의 범위 안에 들어가게 됐고, 투수들의 전략적인 인사이드 피치가 논란의 대상이 된 것이다. 메이스는 채프먼을 의도적으로 맞힐 의도가 없었던 것으로 인정돼 면죄부를 받았다.

두 번째는 이전과 달리 많은 공을 사용하게 됐다는 점이다. 채프먼이 메이스의 공을 피하지 못한데 대해서는 여러가지 이야기가 나왔다. 메이스가 채프먼을 맞힌 공은 스핏볼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핏볼 등의 투구는 이미 채프먼 사건 이전에 금지됐지만 허용돼야 한다는 반론이 힘을 잃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메이스의 독특한 언더핸드 투구 동작이 원인이라는 말도 있었다. 이 때문에 타자가 코스나 구종을 예측하기 어려운 그의 딜리버리가 '위험한 것'으로 비난받기도 했다.

그러나 모두가 공감한 것은 '깨끗한 공'의 필요성이었다. 앞에서 살펴봤듯이 그때까지는 공의 교체가 별로 없었다. 경기를 치르면서 자연히, 또는 의도적으로 상태가 나빠진 공은 타자의 눈에 잘 보이지 않았고, 당연히 쳐내기 힘들었다. 그러나 채프먼의 사망 이후 새 공으로 자주 갈아주도록 하면서 타자들은 잃어버린 시야를 되찾게 됐다. 1919년 내셔널리그가 한 시즌 동안 사용한 공은 2만2천95개였다. 1925년에는 5만4천30개로 늘어났다.

같은 해에 야구 규칙이 정돈되면서 스핏볼 등 변칙 투구의 사용이 금지됐다. 그 배경은 표면적으로 '건강'에 대한 우려였다. 1910년대에 스핏볼이 선수들의 건강을 위협한다는 문제 제기가 있었다. 이에 대해 투수들은 건강이 아니라 '타자'에 대한 위협일 뿐이라고 맞섰다. 스핏볼의 대가였던 에드 월시는 1.92라는 놀라운 통산 평균자책점을 남겼다. 그러나 그는 선수생활 말년에 팔에 이상이 생겨 고통에 시달렸다. 그러자 스핏볼이 월시의 강철 같던 팔을 망가뜨렸다는 소문이 퍼졌다.

스핏볼이 팔을 망친다는 이야기는 그 이전부터 있었다. 1890년대부터 투수로 활동한 빌리 하트는 많은 투수들이 스핏볼에 매달리던 1908년 "나는 엘머 스트릭렛이나 잭 체스브로보다 훨씬 이전에 스핏볼을 익혔지만 팔에 무리를 준다는 것을 알고 나서 던지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사이 영도 1905년 "몇몇 경기에서 스핏볼을 던졌는데 공은 훌륭했지만 팔에 통증을 느껴서 더 이상 던지지 않았다. 나처럼 나이 든 투수에게는 던져서는 안 되는 공이다. 설령 스핏볼이 투수의 팔에 해가 되지 않더라도 패스트볼이나 커브의 컨트롤을 망칠 것이 틀림없다."며 스핏볼의 사용을 반대했다.

1918년 유행성 독감이 미국 전역을 휩쓸면서 수천 명이 사망했다. 그러자 공에 침을 바르는 스핏볼이 비위생적이고 위험하다는 주장과 함께 금지 운동이 전개됐고 결국 메이저리그는 스핏볼은 물론 공에 이물질을 묻히거나 공을 손상하는 모든 투구를 금지하기로 결정했다.

갑작스럽게 타자들이 투수들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게 된 상황을 다소라도 완화하기 위해 예외 조항을 뒀다. 17명의 스핏볼 전문 투수들은 은퇴할 때까지 스핏볼을 던져 메이저리그 경력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또 하나 투수들을 궁지로 몰아 넣은 것은 베이브 루스의 등장이었다. 루스는 1920년 51개, 1921년에 59개의 홈런을 치며 야구 붐에 불을 지폈다. 바로 전해에 터진 블랙삭스 스캔들로 위기를 맞았던 메이저리그는 루스 덕분에 다시 호황을 누리게 됐다.

루스와 로저 혼스비 같은 강타자들이 장타를 펑펑 날려대면서 야구장은 다시 붐비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메이저리그는 공격과 수비, 즉 타자와 투수의 대결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균형을 이루도록 하는 대신 투수들이 지나치게 경기의 주도권을 잡지 못하도록 하는 방향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심판들이 더러워진 공을 수시로 골라내며 잘 보이는 새 공을 공급하고, 반발력이 좋아진 공은 이전보다 훨씬 멀리 날아갔으며, 치기 어려운 스핏볼도 사라졌다. 타자들은 이전보다 공을 더 멀리 보내는 배트를 들고 담장 밖으로 홈런을 날리기 시작했다. 투수들은 홈런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었던 시절의 투구 방식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게 됐다. 데드볼 시대가 끝나고 라이브볼 시대의 막이 올랐다.

극복해야 하는 불리한 환경은 오히려 성장을 가져온다. 투수들은 스크루볼과 너클볼 등 금지되지 않은 마구의 개발에 몰두했고, 데드볼 시대부터 이미 중요하게 생각됐던 제구력을 더욱 가다듬었으며, 체인지 오브 페이스 등 타자를 상대하기 위한 기술이 갈수록 정교해졌다. 생존을 위한 투수들의 노력에 의해 피칭 기술이 진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투수의 시대는 가고 슬러거의 시대가 시작됐지만 여전히 뛰어난 활약을 펼친 투수들이 나왔다. 이들은 투수에게 불리한 환경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타자들과 대결을 펼쳤다.

31세의 나이에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늦깎이 대지 밴스는 파이어볼러였다. 그는 유난히 긴 팔과 큰 하이킥 투구 동작으로 강속구와 날카롭게 꺾이는 커브를 뿌려대며 1920년대 최다 탈삼진 투수로 맹위를 떨쳤다. 밴스는 해진 언더셔츠를 입었는데 공을 던질 때면 오른쪽 소매 끝이 너덜거렸다. 타자의 집중을 방해하기 위해 일부러 찢은 것이었다. 손목 주위에서 펄럭거리는 천 조각에 가려진 패스트볼은 거의 볼 수가 없었다. 야구 규칙의 '소매가 지나치게 헐었거나 찢어진 유니폼 및 언더셔츠를 입어서는 안된다.'는 조항은 그 때문에 생겼다.

그는 한 타자를 상대로 3개 연속 패스트볼을 던져 삼진을 잡고는 다음 번에는 3개 연속 커브만 던져 또 삼진을 잡았다. 그 타자가 불평하자 밴스는 미소를 지으며 "타자가 생각지도 못한 공이 투수가 던질 수 있는 가장 좋은 공"이라고 말했다.

타자를 압도하는 피칭만이 팀에 승리를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니다. 1920년대를 대표할 만한 왼손 투수 허브 페녹에게는 밴스 만큼 빠른 공이 없었다. 커브가 좋았지만 못 칠 정도는 아니었다. 탈삼진이 많지 않았고 이닝 당 1개 이상의 안타를 허용했다. 구위가 뛰어나지 못하다 보니 외야로 날아가는 타구도 많았다. 그러나 비교적 많은 피안타에 비해 경기 당 실점은 3점대에 불과했다.

그의 강점은 '경제성'이었다. 힘들이지 않는 부드러운 동작으로 공을 던져 타자를 맞혀 잡았고, 위기 상황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고 집중력을 발휘했다. 뉴욕 양키스의 감독이었던 밀러 허긴스는 페녹에 대해 "그의 머릿속을 들여다 볼 수 있다면 아마도 리그 모든 타자들의 약점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페녹은 그런 효율적인 피칭으로 월드시리즈에서 5승 무패에 평균 자책점 1.95를 기록했고, 1934년 은퇴할 때까지 241승을 올렸다.

malishi@tf.co.kr

Copyright@더팩트(tf.co.kr)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