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컴투볼파크] 힐만의 니혼햄, 발렌타인의 롯데


[더팩트 | 최정식 선임기자] 올시즌 프로야구에서 가장 관심을 끌었던 사령탑은 한화 김성근 감독과 SK 트레이 힐만 감독이다. 지난 시즌이 끝난 뒤 권한이 대폭 축소된 상태로 팀을 계속 맡게된 김 감독이 명예 회복을 할 수 있을지, 제리 로이스터에 이어 두 번째로 국내프로야구에 등장한 외국인 감독 힐만은 어떤 야구를 보여줄지 궁금했다.

한편으로는 김 감독이 자신을 견제하는 박종훈 단장과 어떤 갈등을 빚게될지, 힐만 감독은 감독 출신 염경엽 단장과 어떤 협력관계를 유지할지도 관심사였다. 결국 김 감독은 23일 물러났다. 힐만 감독의 야구는 진행중이다.

힐만은 2003년부터 2007년까지 일본프로야구 니혼햄의 감독이었다. 니혼햄이 힐만을 감독으로 선택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가 외국인이라는 점이었는데 이는 구단이 새로 도입한 시스템과 관련이 있었다.

니혼햄의 후지이 쥰이치 사장은 J리그 세레소 오사카 사장 시절 독일 명문 클럽 바이에른 뮌헨의 평가 시스템을 접한 적이 있었다. 선수의 신체능력, 지구력, 민첩성 등 여러 항목으로 나눠 계량화한 것이었는데 그는 이를 프로야구에 접목시키려 했다. 이에 따라 다카다 시게루 단장의 지휘 아래 신체능력, 기술, 성격, 전술면의 적합성 등 다양한 평가 포인트를 갖춘 선수평가 시스템을 개발했는데 완성하는데 무려 1억엔이 들었다.

시스템을 마련한 니혼햄은 '그라운드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감독의 권한, 선수단 구성은 단장의 권한'이라는 분권형 제도를 추진했다. 본격적인 제너럴 매니저(GM)의 도입은 일본프로야구에서 낯선 일이었다. "일본인 지도자들은 GM과 감독의 분업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현장과 프런트의 임무를 나누는 제도를 확립하려면 외국인 지도자가 낫다"는 생각으로 힐만을 영입했다.

구단의 기대대로 힐만 감독은 드래프트, 트레이드, FA 등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고, 구단이 만들어준 전력을 갖고 싸우는데만 자신의 영역을 한정지었다. 그리고 2006년 니혼햄은 일본시리즈를 제패했다. 힐만은 "내가 잘해서 우승했다고 할 수 없다. 나는 퍼즐의 한 조각일 뿐"이라고 말했다. 겸손만은 아니었다. 감독과 프런트의 역할에 대한 공감에서 비롯된 말이었다. 니혼햄의 성공은 일본프로야구 구단 운영의 변화에 중요한 전기가 됐다.

그러나 외국인 감독이라고 모두 힐만 같지는 않다. 지바롯데 감독이었던 바비 발렌타인은 달랐다. 1995년 롯데는 일본 최초로 GM제도를 도입했다. 단장과 감독의 역할을 나눈 새로운 체제는 히로오카 다츠로 단장과 발렌타인 감독이 팀 운영의 방향성을 놓고 이견을 드러내면서 갈등이 심화됐다. 롯데는 그해 2위에 오르며 10년 만에 상위권 성적을 거뒀지만 발렌타인 감독은 단 한 해를 보내고 해임됐다. 롯데는 다음해부터 다시 하위권으로 떨어졌고 히로오카도 2년 만에 물러났다.

발렌타인은 2004년 롯데 감독으로 복귀했다. 자신의 권한에 대해 명확히 하고 계약한 것은 물론이다. 그리고 이듬해 롯데는 일본프로야구 정상에 올랐다. 우승한 뒤 발렌타인의 권한은 더 확대됐다. '그라운드 안'은 말할 것도 없고 트레이드와 드래프트 등 선수단 구성, 심지어는 팬서비스 기획과 영업에 이르기까지 팀과 관련된 모든 정보를 보고받는, 사실상 GM의 역할까지 겸하는 '전권 감독'이 됐다.

비슷한 시기에 일본시리즈에서 우승한 발렌타인과 힐만은 이렇게 달랐다. 어느 쪽이 옳은가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극히 대조적인 두 경우가 시사하는 바가 중요하다. 아무리 바람직하다고 생각되는 제도도 계획과 준비, 세심한 진행 없이 시행되면 제대로 운영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역할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제대로 수행하는 일이다. 준비는 커녕 예상되는 문제까지도 무시하고 남들이 성공한 길이라며 무작정 따라나서는 구단을 KBO리그에서 봐야 한다는 사실이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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