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 | 최정식 선임기자]
스핏볼
야구공에 침을 바르는 스핏볼(spit ball), 진흙을 바르는 머드볼(mud ball), 공을 샌드페이퍼로 문질러 거칠게 만드는 에머리볼(emery ball), 공을 마찰하여 미끌거리게 하는 샤인볼(shine ball) 등의 투구는 반발력이 죽은 공과 함께 데드볼 시대 타격 침체의 원인이었다. 패스트볼이 빠르지 않거나 좋은 커브를 갖고 있지 못한 투수들은 공에 이물질을 묻히거나 변형시키는 방법으로 비정상적인 변화나 궤적을 만들어내 타자를 제압하고 다른 투수들과 경쟁할 수 있었다. 스핏볼은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고 선수 수명을 연장할 수 있게 해주는 무기였다.
커브가 그렇듯이 최초의 스핏볼러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도 여러 주장이 있다. 1871년 최초의 프로리그였던 내셔널어소시에이션(NA)의 첫 경기에서 승리투수가 됐던 보비 매튜스가 유력한 후보 가운데 한 명이다. 매튜스는 NA가 생기기 전, 투수들이 언더핸드로만 던져야 했던 1868년부터 이미 스핏볼을 던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또 1876년 뉴베드포드 투수였던 톰 본드는 주머니에 글리세린을 넣어두고 이를 이용해 스핏볼을 던졌다고 한다. 이보다 앞선 1860년대 초반에 이미 투수들이 스핏볼을 던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엘머 스트릭렛을 스핏볼을 도입한 인물로 본다. 그가 스핏볼을 처음 던진 것은 아니지만 메이저리그에 전파되는데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20세기 초 스핏볼로 명성을 떨친 대표적인 투수는 잭 체스브로와 에드 월시인데 이 두 명이 모두 스트릭렛의 '제자'였다. 새크라멘토 세너터스의 투수였던 스트릭렛은 1902년 27승 22패로 마이너리그 기록을 세웠는데 이때 외야수 조지 힐데브랜드에게 배운 스핏볼을 던졌다. 힐데브랜드는 다른 마이너리그 팀 동료였던 프랭크 코리던을 통해 스핏볼에 대해 알게 됐다.
1902년 코리던은 그립 감을 좋게 하기 위해 손가락 끝에 침을 뭍혀 던졌는데 공이 기묘한 변화를 일으키는 것을 발견했다. 코리던과 힐데브랜드는 공을 어느 정도 적셔야 가장 효과가 큰지를 실험해 보며 이 새로운 공을 가다듬었다. 힐데브랜드는 이해에 새크라멘토로 팀을 옮겼고 스트릭렛에게 스핏볼을 던지는 법을 알려 줬다.
스트릭렛은 스핏볼을 메이저리그에서 성공하는 발판으로 삼으려 했다. 그는 1904년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훈련 캠프에 참가했는데 중력의 법칙을 무시하듯 홈플레이트 앞에서 휘어지며 떨어지는 공에 타자들은 헛스윙을 연발했다. 화이트삭스의 포수 빌리 설리번은 스트릭렛의 공을 받아주다가 공이 젖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흥미를 느꼈다. 설리번은 스트릭렛의 공에 감탄하면서 뭐라고 부르는지 물었다. 스트릭렛은 "나도 잘 모르지만 스핏볼이라고 부르면 좋을 것 같다."고 대답했고 그때부터 스핏볼로 불리게 됐다.
설리번은 잠시 관심을 뒀을 뿐이지만 스트릭렛과 같은 방을 썼던 월시는 달랐다. 월시는 패스트볼 하나만을 던지는 투수였다. 그는 바로 전해에 마이너리그에서 20승을 올린 덕에 화이트삭스 유니폼을 입게 됐지만 돈을 많이 받을 수 없었다. 화이트삭스의 구단주 찰스 코미스키는 월시가 패스트볼밖에 던질 줄 모른다는 것을 알았지만 싼 연봉에 쓸 수 있다는 점 때문에 그와 계약했다.
패스트볼이 아닌 다른 공이 필요했던 월시는 스핏볼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누구든지 스핏볼에 흥미를 느끼는 투수가 있으면 신이 나서 시범을 보였던 스트릭렛은 월시에게도 던지는 법을 가르쳐 줬다.
다른 모든 구종과 마찬가지로 스핏볼도 컨트롤이 잡혀야 좋은 무기가 될 수 있다. 뉴욕 하이랜더스(뉴욕 양키스의 전신)의 체스브로는 스핏볼의 위력을 앞세워 1904년 한 시즌 41승의 대기록을 세웠지만 중요한 경기에서 스핏볼 때문에 뼈아픈 패배를 당했다.
그해 뉴욕은 보스턴 필그림스와 아메리칸리그 우승을 다투고 있었다. 시즌 내내 선두를 달렸지만 보스턴에게 추격을 허용해 한 게임 반 차로 뒤진 채 마지막 더블헤더 맞대결을 남겨놓았다. 그 더블헤더의 첫 경기에 체스브로가 등판했다.
2-2로 동점을 이룬 가운데 9회 2사 3루. 체스브로는 보스턴의 강타자 프레디 페런트를 상대로 원 볼, 투 스트라이크에서 삼진을 잡기 위해 스핏볼을 던졌다. 그러나 컨트롤이 되지 않은 공은 포수의 머리 훨씬 위로 날아가는 폭투가 됐다. 뉴욕은 더블헤더 2차전을 연장 끝에 1-0으로 이겼지만 이미 우승은 보스턴에게 넘어간 뒤였다.
체스브로는 그 시즌 55경기에 출장해 454⅔이닝을 던지며 41승 12패, 평균자책점 1.82라는 놀라운 성적을 거뒀지만 사람들에게는 한 번의 폭투가 더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은퇴한 뒤에도 그 폭투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받아야 했고, 결정적인 순간에 폭투가 나오면 사람들은 그를 떠올렸다.
체스브로는 스핏볼을 던지는 방법을 알고 있었지만 컨트롤이 되지 않아 실전에서 쓸 수 없었다. 그는 당시 스핏볼로 유명했던 스트릭렛의 지도를 받아 컨트롤을 잡을 수 있었고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제구가 되지 않아 통한의 패배를 맛봐야 했다.
월시 역시 스트릭렛에게 스핏볼을 배웠지만 컨트롤의 문제 때문에 그 후에도 2년 동안 이전처럼 패스트볼만 던졌다. 피나는 노력 끝에 1906년에 마침내 스핏볼을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됐다. 데드볼 시대의 뛰어난 올라운드 플레이어 가운데 하나였던 샘 크로포드는 월시의 스핏볼에 대해 "볼이 날아오면서 여러 개로 갈라졌다가 포수의 미트에 들어갈 때 다시 뭉쳐지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스핏볼을 새로 장착한 월시는 10차례의 완봉승을 포함해 17승을 올리며 화이트삭스가 1906년 아메리칸리그에서 우승하는데 기여했다. 월시는 시카코 컵스와의 월드시리즈 3차전에 등판해 삼진 12개를 잡아내며 단 2안타만을 내주고 3-0 승리를 이끌었다. 내셔널리그에는 아직 스핏볼을 던지는 투수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컵스 타자들은 월시의 공을 쳐낼 수 없었다. 월시는 1908년 40승에 평균자책점 1.42를 기록하며 최고의 시즌을 구가했다.
체스브로와 월시는 스핏볼 덕분에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이들의 '스승'이었던 스트릭렛은 1905년 브루클린 다저스에 들어가 메이저리거의 꿈을 이뤘지만 오래가지 못했고 자신의 스핏볼로 명성을 떨칠 기회를 얻지 못했다.
체스브로와 월시 등의 성공을 지켜본 많은 투수들이 스핏볼을 던지기 시작했다. 스핏볼로 운명이 바꾼 투수 가운데 한 명이 스탠 코벨레스키다. 코벨레스키는 1912년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의 입단 테스트를 통과했지만 투수진에 들어갈 수 없었다. 당시 필라델피아에는 치프 벤더, 에디 플랭크, 잭 쿰스, 허브 페녹 등 쟁쟁한 투수들이 즐비했기 때문이다.
마이너리그로 내려간 그는 포틀랜드에 있던 1915년, 투수로서 전기를 맞았다. 컨트롤이 뛰어났고 패스트볼과 커브도 괜찮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했고 영원히 빅리그로 올라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그러다 동료 투수가 스핏볼을 던지는 것을 보고 배우기로 마음먹었다. 스핏볼을 익힌 그는 다음해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로 올라갔고 13년간 200승 이상을 따냈다.
스핏볼은 침은 물론 이마에서 흐르는 땀이나 머리의 기름은 물론 바셀린과 파라핀 등 공과 손가락의 마찰을 줄일 수 있는 것이라면 모두 이용할 수 있다. 공의 회전이 덜 걸리도록 해서 패스트볼을 던지면 공기 저항 때문에 홈 플레이트 앞에서 급격하게 속도를 잃고 크게 떨어진다.
스플릿핑거 패스트볼(split-fingered fastball, 스플리터)과 원리나 효과가 비슷하다. 공과 손의 마찰을 줄이는 방법이 다를 뿐이다. 패스트볼과 처음 속도나 투구 동작에 차이가 없기 때문에 타자들이 대처하기 힘들다.
데드볼 시대의 투수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스핏볼을 던졌다. 스트릭렛이 월시에게 알려준 것은 실밥과 실밥 사이에 침을 뱉고 그 부분을 손가락으로 잡아 패스트볼처럼 던지는 것이었다.
코벨레스키 같은 투수들은 백반을 입에 물고 있다가 검지와 중지를 침으로 적셔 스핏볼을 던졌다. 씹는 담배의 즙도 널리 이용됐다. 스핏볼은 그 자체의 변화로도 효과를 볼 수 있지만 기술이 뛰어난 투수가 던질 때 더 큰 위력을 발휘한다. 코벨레스키는 손목을 이용해 세 방향으로 휘어져나갈 수 있도록 조정하는 것이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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