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구의 역사] 사와무라와 김양중의 강속구(상)

[더팩트 | 최정식 선임기자]

사와무라와 김양중의 강속구

메이저리그는 매 시즌 양 리그 최고의 투수 한 명씩을 선정해 사이 영상을 시상한다(1966년까지는 양 리그를 통틀어 한 명에게만 상을 줬다). 역대 최다승 투수인 영을 기념하기 위해 그의 이름을 붙였다.

일본도 최고 투수에 대한 시상 제도가 있는데 그 상의 이름이 사와무라상이다. 1930년대 후반부터 1940년대 초반까지 활동했던 투수 사와무라 에이지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제정했다. 사와무라는 1936년 시작된 일본프로야구에서 요미우리의 에이스로 맹활약하면서 이듬해 제정된 MVP의 첫 수상자가 됐고, 짧은 선수 생활에도 노히트 노런을 세 차례나 달성했다.

그가 명성을 떨치게 된 것은 프로가 생기기 전인 1934년 베이브 루스 등 메이저리그 스타들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였다. 일본 전체에서 선발된 선수들이 메이저리그 올스타와 친선경기를 벌였는데 당시 17세였던 사와무라는 루 게릭에게 홈런을 허용했을 뿐 루스와 게릭, 지미 폭스 등을 삼진으로 돌려세우는 등 강타선을 1실점으로 막으며 완투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두 차례나 군에 소집돼 수류탄 투척으로 어깨가 망가졌고, 전투 중 왼손에 총상을 입었지만 프로야구에 복귀해 1940년 3번째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다. 3번째로 군에 소집된 1944년 타고 있던 수송선이 어뢰에 격침되면서 전사했다. 그는 초창기 일본프로야구 최고의 스타로 활약했고 메이저리거들과의 대결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긴데다 전쟁으로 요절했다는 비운까지 더해 '사와무라 앞에 사와무라 없고 사와무라 뒤에 사와무라 없다'고 할 정도로 전설적인 인물이 됐다.

투수로서 사와무라의 무기는 '드롭'과 강속구였다. 드롭은 낙차가 큰 커브를 말한다. 일본에서는 한동안 가로로 휘어지는 커브에 대해 위에서 아래로 크게 떨어지는 커브를 따로 드롭이라고 불렀고 그 영향으로 국내에서도 1970년대까지 드롭을 별개의 구종으로 취급했다. 미국에서도 오래 전 홈플레이트 근처에서 갑자기 떨어지는 공에 대해서 드롭 또는 드롭볼이라고 불렀으나 커브를 가리키는 말은 아니었으며, 이후 싱커라는 명칭으로 대체됐다.

사와무라의 커브에 대해서는 낙차가 워낙 크다고 해서 '현하(懸河)의 드롭', 타자의 머리 위까지 떠올랐다가 갑자기 브레이크가 걸리면서 단계적으로 떨어진다고 해서 '3단 드롭'이라고 불렀다. 다소 과장이 섞인 표현이지만 일본 원로 야구인들의 한결같은 회고를 보면 그 위력이 당시로서는 대단했던 것 같다.

1934년 친선경기 때 게릭이 홈런을 쳤던 공도 드롭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일설에 따르면 메이저리그 타자들이 사와무라의 강속구와 드롭에 쩔쩔매자 명투수 출신인 루스가 동료들에게 "패스트볼은 버리고 후크(hook.커브의 별칭)를 노려라"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게릭이 친 공도 변화가 나쁘지 않았으나 볼 배합 상으로 언제 들어올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공략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한 원로 야구인이 "사와무라의 드롭이 속구와 구속이 별로 차이가 나지 않았다"고 말한 것을 두고 일부에서는 커브가 아니라 아래로 변화하는 슬라이더나 포크볼이었을 수도 있다고 보기도 한다. 사와무라가 독자적으로 개발한 변화구였다는 주장도 있다.

사와무라의 공이 무척 빨랐다는데는 의견이 일치하지만 과연 스피드가 어느 정도였는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다. 사와무라의 피칭을 직접 봤던 야구인들은 대체로 '시속 155㎞ 정도'라는 의견이 많았다.

비록 친선경기였다고는 하지만 메이저리그의 강타자들이 쉽게 치지 못했을 정도라면 현재 투수들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스피드를 알아보려는 시도가 여러 차례 있었다.

일본의 스포츠 과학자 유아사 가게모토는 1935년 유일한 프로팀이었던 요미우리가 미국 순회경기에 나섰을 때 사와무라의 캐치볼 모습을 찍은 영상을 찾아냈다. 유아사는 여러 명의 투수들을 동원해 캐치볼과 전력투구를 비교하는 방법으로 사와무라가 전력투구했을 때의 스피드를 추정한 결과 160.4㎞가 나왔다고 밝혔다.

한 TV 방송은 타자로 사와무라를 상대했던 이들을 타석에 세워두고 피칭머신으로 공을 날려 어느 정도였는지를 추정했는데 160㎞가 나왔다. 그러나 아무리 과학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해도 캐치볼 동작에서 전력투구 시의 스피드를 추정하는 것은 정확성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야구인들의 감각으로 추정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1937년에 발행된 한 잡지에서는 "과학적인 계측치이기는 하지만 정확도를 확신할 수 없다"며 사와무라가 던진 공이 초속 37m(시속 133.2㎞)라고 전하고 있다.

일본프로야구 공식경기에서 나온 최고 구속은 니혼햄의 오타니 쇼헤이가 2016년에 기록한 시속 165㎞다. 임창용도 야쿠르트 시절인 2009년 160㎞까지 나온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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